남혐은 실존하는가

[편집자 말] 지난 1월 15일, 류호정 의원이 “드디어” 정의당 탈당을 선언했다. 이미 그는 작년 말부터 “세번째 권력”의 주요 멤버로서 정의당을 공개비판해 왔다. 그리고 그 비판은 페미니스트였던 그의 전향 선언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류호정이 지난 4년 동안 받은 공격의 대부분은 부당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뱉은 새롭지만 낡은 말들은 결코 정당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아 보인다. ① 그는 왜 이렇게 변했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려는 걸까? 그리고 그의 ② ‘모든 남성은 가해자’라는 말에 대한 비판, ③ ‘남혐’에 대한 우려, ④ 여성 징병제 찬성까지, 이런 주장들은 왜 문제적인 것일까?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남혐’.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현상으로까지 일컬어지며 논란을 빚어내는 “남성 혐오의 심각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체를 직접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목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부 여초 커뮤니티를 ‘눈팅’만 해본다면 ‘남성 혐오’ 실태의 면면을 알 수 있다. 일부 여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남성들이 ‘혐오’당한다고 느낄 만한 과격한 언사나 조롱의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곤 하는데, 이를테면 ‘한남충’, ‘소추’, ‘6.9’, ‘재기’ 등등의 표현이 바로 이것이다.

혐오라는 착각

남성들, 그리고 언론이 이야기하는 ‘남성 혐오’란 무엇일까? ‘혐오’의 개념을 사회적 맥락 속의 차별과 폭력의 산물이 아닌, 특정 대상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부분에서 ‘남성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여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착각이 발생하고, 이 착각에 빠진 남성이 자신이 차별의 피해자라고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남성은 특정한 상황 속 “조롱의 피해자”이지 차별의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혐오 표현’이란 사회적 소수자 개인 혹은 집단을 향한 차별·혐오, 차별·적의·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말한다. 소수자 혐오가 지속되고 강화할수록 소수자들이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배제는 더욱 공고해지는데, 여기서 우리는 ‘남성 혐오’ 가 혐오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기득의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비백인이 백인을,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이주자가 내국인을 차별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혐오 표현이 성립하려면 그 행위가 대상 집단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하고 강화한다는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만, 반대로 여성이 남성에게 모욕이나 조롱을 행하는 경우-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남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는 ‘혐오 표현’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남성 중심 권력의 지배 체제와 성차별적 구조가 유지되는 한 남성 조롱, 남성 비하 등은 존재할 수 있어도 남성 차별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이유는 권력관계가 전제된 상황에서 중심집단이 주변집단을 사회에서 억압하는 기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변집단이 중심집단을 향해 발화하는 조롱은 권력관계의 전복을 통한 쾌감얻기 즉, 풍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혐오라는 단어를 오남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여성이 남성을 혐오하는 것 또한 잘못되었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여혐’과 ‘남혐’이 똑같이 ‘나쁜 행위’가 되고, ‘여혐 논란’, ‘남혐 논란’이라는 언어로 이슈화된다.

‘남성 혐오’의 실체

시작에서 언급했지만, 우리는 여성들이 행하는 남성에 대한 조롱, 경멸, 비하가 어디서 실천되고 있는가?에 대한 답도 알고 있다. 바로 ‘온라인’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을 보고 여성들이 드러내는 반응으로, 반발심에 다소 공격적인 표현이 더해진 것이다. 이런 표현이나 신조어들은 흔히 말하는 “미러링”의 발전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남초 커뮤니티 등 일부 남성 집단이 그 ‘표현’을 ‘남성 혐오’라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이렇게 온라인에서 발견되는 ‘남성 혐오’는 남성의 여성혐오 발언이나 여성혐오 범죄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탄생 배경이 여성혐오에 대한 분노와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 오늘날 청년, 청소년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엠창’, ‘니애미’, ‘김치녀’, ‘아몰랑’, ‘오또케’, ‘ㅗㅜㅑ’ 등과 같은 어휘들에는 역사적으로 여성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거나 성희롱적 용례가 많다.  이런 말들을 ‘여성혐오’라고 말하는 것과, 여성들이 남성들의 여성혐오와 차별에 반발해 사용하는 어휘나 제스쳐를 ‘남성 혐오’라고 말하는 것이 똑같이 ‘맞는 말’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방금 본 신조어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저출산’, ‘유모차’, ‘맘스스테이션’같은 육아의 역할을 여성에게 한정하는 의미가 내포된 단어라거나, ‘여직원’, ‘여배우’, ‘여교사’, ‘여의사’와 같은 남성을 기본값으로 두어 ‘여’를 붙이는 모든 단어, ‘시댁, 도련님, 서방님’같은 남성 배우자의 가족들만 높여 부르는 호칭 등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하거나 여성을 낮추는 의미를 담는 차별적 용어가 상당수 존재한다. 이 같은 일상 용어들에 차별의 소지가 있다는 인식 자체도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 이상으로 남성혐오도 심각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여성들이 온라인에서 행하는 ‘남성 혐오’는 사회 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대다수 여성은 사회구조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지위나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남성 혐오’나 ‘남성 차별’은 사회적으로 실천되고 있지 않다. ‘남성 혐오’ 주창자들에게 묻고 싶다. 여성들이 현실 사회에서 남성들에게 해를 가하는가? 면접장에서 ‘사상검증’을 하고 취업에 불이익을 주는가? 승진에서 차별하고 배제하는가? 불법 촬영물을 유통, 거래하는가? 지나가는 남성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가? 술을 먹이고 강간하는가? 살해하는가? 이 사회가 남성들의 임금을 여성보다 30%씩 덜 주는가?

“남성 차별”의 근원 – 무엇이 허상을 실상으로 만드는가?

이렇게 여성들이 일상적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이 명백함에도, 일부 남성들이 이를 부인하고 ‘남성 혐오’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위기가 낳은 사회적 불안정성과 경쟁 논리 때문이다. 이 시대 청년 남성의 상당수는 과거 평범한 남성들이 청년기에 기대했던 경제적, 사회문화적 지위를 쉽게 보장받지 못한다. 여성과 그 정도나 빈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겠지만, 남성들도 고용불안과 취업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청년 남성들이 노동시장에 안착하기 어려운 원인을 이 사회의 경쟁 논리와 능력 지상주의가 아닌,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보는 것은 문제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기존 사회구조에 남성들이 편승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청년들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요당하고 있다. 원치 않게 체제 한복판에 내몰린 청년들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누구이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지금이 어느때보다 청년들이 살기 힘든 시대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은 대안으로 ‘공정성 회복’, ‘일자리 증진’을 내건다. 그러나 이 ‘늘어난’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시험을 치러야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족해진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남성, 여성 청년들이 피터지게 경쟁하는 것이다.

이런 무한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경쟁 상대가 얻은 성과물이 ‘공정한 규칙’대로 얻어진 것인지로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회의 구조적 차별이나 약자의 존재는 점점 더 인식되기 어려워진다. 사회적 약자는 그저 경쟁에서 낙오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으로, 구조적 차별은 ‘노력’으로 극복한 사람도 있다는 성공신화로 대체된다. 청년 남성들이 같은 세대 여성들이 이전 세대부터 계속해서 받아오던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더더욱 무감해지고 오히려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을 적대시 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컨대, GS25, 넥슨 사태 논란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매체만으로 사안을 접한 일부 남성들은 이 사건을 보고 남성이 차별받고 혐오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주지했듯 사회구조적 남성 차별은 없다).  그러나 이미 드러났듯 이 사건들은 페미니즘을 증오하는 온라인 세계 남성들이 이른바 ‘페미’를 ‘색출’해내 낙인찍기 위해 손가락 고리 모양을 열심히 찾아 헤맸던 페미니스트 죽이기 프로젝트의 성공적 결과물이었다. 혐오는 커녕 조롱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이 사건에서, 오히려 강화된 것은 억지 ‘남혐’ 논란과 기업의 사상검증 그리고 정치권의 포퓰리즘 대응이었다.

‘젠더갈등’ 프레임을 키워낸 사람들, 이득을 보는 사람들

진정 주목해야 할 문제는, 청년 남성들의 절망이 이 사회가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기울어져 있다는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 일부 여성이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서 남성보다 나은 처지에 있을 때조차 그것은 계급이나 경제적 격차에서 오는 다른 범주의 문제일 뿐이고, 성별이라는 범주에서는 여성이 차별받고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억압받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남성 청년들은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등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려 차별받고, 빈곤과 불안정성 속에서 고통받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동계급 여성들과의 관계에서조차 멀어져 소외감과 슬픔을 느끼고 있다. 이는 여성들의 ‘남성혐오’ 때문이 아니라, 기성 정치세력이 만들어 놓은 경쟁 지상주의-시장 만능주의 사회에 의한 것이다. 그 사회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 또는 승리하기 위해 사회 구조의 불평등에는 눈감고 오직 개인의 능력과 의지라는 주문만 외우게 된 사람들이 구조를 지적하기보다 여성들을 문제 삼고 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사실 남성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데이트 비용을 누가 낼지를 가지고 여성들과 싸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데이트 비용도 충분히 벌 수 없게 만드는 이 사회를 바꾸려고 해야 한다. 그러려면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 주장의 정당성에 연대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여성들의 투쟁으로 이 경쟁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회가 흔들릴 때, 그리고 시장과 1등, 공정의 논리가 흔들릴 때 남성들의 삶도 나아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런 팍팍한 사회를 만든 것에 대해 가장 중요한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 그 중에서도 민주당이 (남성) 청년 세대의 이기심을 문제삼는 것은 사실 웃지 못할 일이다.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정리해고를 쉽게 가능하게 만들고, 빈부격차와 불평등, 실업, 일자리 불안을 심화해 개인주의화의 발판을 마련해 준 정권이 바로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이 N번방 추적단 ‘불꽃’ 활동가를 비대위원장으로 선임한다거나 대선 후보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을 하는 등 여성주의적 행보를 간혹 보였다고 해도(낙태죄 유지, 미투 등으로 그조차 무색하게 만들었으나), 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고 공고히 한 주범, 오늘날 청년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불안감의 원인 제공자라는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인들은 여성혐오의 토양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 사회의 여성혐오 분위기를 적극 재생산해서 이득을 보는 이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혐’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남초 커뮤니티였지만,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이를 현실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정치인들, 기업, 언론이었다. 언론은 조회 수와 이른바 트롤링(관심 끌기)에 치중해 커뮤니티의 글을 마구 퍼다 날랐고, 정치권은 ‘젠더갈등’과 청년세대에 대한 우려를 활용해 표를 끌어 모았으며, 기업은 ‘남혐’논란이 발생하면 시류에 편승해 ‘남혐’을 ‘저지른’ 여성을 대신하여 ‘해명’과 ‘사과’를 했다. 마녀사냥당한 여성들 덕에 남성들의 화가 조금 가라앉은 자리에는 어느 새 허상의 ‘남혐’이 실재하는 사회문제처럼 둔갑해 있었다.

결국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젠더갈등’이라는 단어는 청년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를 부각해 이 사회의 진정한 기득권자들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 계급 사이의 간극을 비가시화한다. 경쟁과 차별을 당연한 자연현상처럼 정당화하고, ‘나쁜 일자리’로 사람을 착취하고, 기득 이익을 가진 자들이 이득을 본다.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남성 혐오’를 인정해 분열을 야기하는 전략을 통해 현 체제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결론

류호정 의원이 자못 우려하는 ‘젠더갈등’, ‘남혐’ 이라는 사회 문제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들은 본질을 왜곡할 뿐이다. 여성 개인들이 특정 상황에서 남성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온라인상에서 ‘갈등’을 빚을 수 있으나, 이것을 심각한 ‘사회문제’처럼 ‘격상’시키는 것은 문제다. 이런 프레임은 실재하는 여성혐오 문제의 심각성을 퇴색시키며 여론을 호도한다. 여성이 남성을 조롱하는 행위가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 사회가 남성 일반을 차별하는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의 특정 영역에서 남성 개인이 차별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개인 역시 남성 중심 체제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여성들이 남성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표현을 온라인에서 공공연히 사용하는 커뮤니티 문화의 시대적 흐름에 주목하고자 한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 맥락을 제대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현상의 근원에는 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자리하고 있다.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온라인에서의) 조롱과 반항은 실제 직장 내에서 승진과 승격에서 배제되고 차별받거나 성폭행당하거나 가부장제에 희생당한 경험에서 나오는 반발의 표현이자, 여성혐오에 대한 대응이다.

온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들의 급진화를 표현하는 한 단계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성에 대한 범죄와 성폭력 소식, 온갖 일상적 차별에 대한 분노와 불안감이, 여전히 이런 문제를 오프라인에서 제기해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무력감과 결합되어 온라인에서 표출되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온 여성들은, 현실 세계에서 집단적 저항에 나서고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 낯설고 그 불이익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런 방어 기제는 온라인에서 익명성을 빌어 공격성으로 격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남성을 배제하고 연대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한국식 페미니즘’이라고 낙인찍어 버리는 것은 조급하다. 여성들이 가진 정당한 분노와 박탈감은, 문제적 남성 개인보다 구조적 성차별에 맞서고자 하는 폭넓은 여성운동과 결합될 수 있다. 진정한 문제는 어떻게 그런 여성들의 정서와 접점을 만드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이를 이끌어 낼 방법이 무엇인지 정치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다. [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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