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말] 지난 1월 15일, 류호정 의원이 “드디어” 정의당 탈당을 선언했다. 이미 그는 작년 말부터 “세번째 권력”의 주요 멤버로서 정의당을 공개비판해 왔다. 그리고 그 비판은 페미니스트였던 그의 전향 선언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류호정이 지난 4년 동안 받은 공격의 대부분은 부당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뱉은 새롭지만 낡은 말들은 결코 정당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아 보인다. ① 그는 왜 이렇게 변했고,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려는 걸까? 그리고 그의 ② ‘모든 남성은 가해자’라는 말에 대한 비판, ③ ‘남혐’에 대한 우려, ④ 여성 징병제 찬성까지, 이런 주장들은 왜 문제적인 것일까?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달 11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하 류호정)과 금태섭 전 의원(이하 금태섭)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신당 창당 모임 ‘새로운 선택’의 기자회견을 열어, “남녀 병역 평등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자”는 주장도 내놓았다. “나라를 지키는 남자, 집에서 가족을 돌보는 여성이라는 성역할 구분이 한국 가부장제의 기초”이니 “가정 성평등을 이루려면 병역 성평등”도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군대에 가는 것이 가정 성평등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금태섭은 몰라도, “페미니스트” 류호정까지 ‘남성의 병역 부담’과 ‘여성의 가사 노동 부담’을 일종의 교환관계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당혹스럽다. 자본주의-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각기 다른 성적 규범과 역할을 강제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고, 남성 징병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근대 국가가 군대에 복무할 인력을 충원하는 방법은 18세기부터 지금까지 다양하게 변화해왔지만, 가사와 육아 등 재생산노동의 주된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는 성별 규범은 계급 사회가 발생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아왔다.

실제로 성별과 무관한 모병제로 병력을 충원하는 미국에서도, 가사와 육아 노동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부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다른 모병제 국가인 인도는 극심한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악명 높은 나라다. 이와 반대로, 남성에 한정된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무조건 남성의 가사분담율이 낮은 것도 아니다. 덴마크와 핀란드는 한국에 비교해 남성의 가사분담률이 두 배 이상 높지만 남성만 징병하는 나라들이다. 여성에 대한 징병제를 실시하지만 여성 인권 수준이 한국보다 높다고 전혀 이야기하기 어려운 북한 같은 나라도 존재한다. 남성 징병제와 여성의 가사노동 전담 사이에 교환관계가 성립되는 것처럼 보는 것은 현실에서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여성들이 사회적 기여를 적게 해서 가정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나
이 물음에 대해 ‘아니오’라는 답을 자신 있게 내놓기에는, 여성들이 다른 여러 직업 세계에서 겪는 현실도 너무나 차갑다. 군대 의무 복무 정도를 제외하고, 사회의 각 영역에서 여성들은 이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고 그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경제활동인구에 해당하는 여성의 비율은 2011년 53.1%에서 2022년 60%까지 증가했고, 남성 경제활동인구(76.9%)와의 격차도 15% 수준으로 낮아졌다. 심지어 2021년 기준 25~29세까지 여성의 고용률은 70.9%에 이를 정도다.
그러나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매끄럽게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놀랍게도, 최근의 한 연구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정을 이어지는 대신 정반대로 청소년 남성 사이에서 여성을 여성혐오가 강화되는 역설이 벌어짐에 주목했다. 여성을 노동시장의 위협적 경쟁 요소로 인식하여, 오히려 여성들의 능력과 기여를 폄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들의 취업과 노동이 남성들의 그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평가해 온 오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회 활동보다는 가사와 육아 노동의 책임이 기본적으로 여성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 탓에 여성들은 취업과 승진, 장기근속, 고과평가 등에서 항상 불리한 처지에 놓이고, 특히 기혼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지느라 경력단절과 불리한 노동조건 등을 감수해야 한다. 여성들의 30대 이후 고용률이 57.5%까지 급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다시 말해, 여성들이 사회에 기여를 덜 하고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여성들이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에 모두 종사하면서 이중의 굴레에 시달리는데도 그 기여를 사회가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서 문제다. 이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가 낡은 성별 규범을 통해 재생산 노동 비용을 사회 대신 여성들에게 떠넘기는 핵심적 방식이기도 하다. 여성의 생산노동에 대한 기여를 폄훼함으로써, 그들이 취업을 했든 아니든 언제나 개별 가정에서 재생산 노동을 당연히 전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군대는 여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가?
또 한 가지 류호정과 금태섭이 무시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군대에서 현재 일하는 여성들이 일상으로 마주하는 현실이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위계와 폭력이 자연스러운, 남성중심문화가 극대화된 공간이며 심지어 사회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남성 군인조차 이러한 문화 속에서 일상적 폭력으로 고통받는데, 동료 군인이기보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부각된 채 생활하는 여성 군인들은 더욱 쉽게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답변 없이, 가정 성평등을 위해 일단 여성들도 군대에 가자는 주장은 설득력도 있기 어렵다.
언론에 널리 알려진 사례들만 보아도, 최근까지 육해공군 모두에서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4명의 여성 간부들이 스스로 생을 포기했다. 해군에서 벌어진 한 사건은 가해자가 피해 여성이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빌미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1년 전국의 각 군 부사관 및 장교 27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여성 군인은 32.1%, 괴롭힘을 경험한 여성 군인은 42.9%에 이르렀다. 2019년 국방부의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음을 인지한 뒤 신고한 비율은 32.7%에 그쳤다. 피해를 보고하지 않은 피해자들의 44%는 신고를 하더라도 ‘아무 조처도 취해질 것 같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이미 존재하는 피해자조차 구제받지 못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여성의 의무복무를 주장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해소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직접적인 피해자를 추가적으로 양산하는 꼴에 불과하다.
모든 국민이 군대에 가는 것이 필요한가?
사실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류호정에게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바로 그가 징병제나 군대라는 국가기구 자체에 대한 어떤 급진적인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징병제는 한국 사회에서 결코 바뀔 수 없는 제도인가? 이미 한국의 징병제의 구체적 내용은 복무 기간 등 여러 면에서 변화해왔다. 더구나 전 세계의 모든 국가의 분쟁에 개입하는 미국조차도 현재 징병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고, 국제적으로 다른 여러 나라들도 그렇다.
분단 국가의 군사적 긴장에 대응해 전쟁 억지를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낡은 사회 통념에 불과할 뿐이다. 이미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장비와 기술 수준에서 한국군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한국의 ‘적정 육군 병력 규모’를 얼마로 계산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차피 북한이 재래식 무기보다 핵무기에 의존한 도발을 주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육군 병력의 규모가 한반도 긴장 완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2024년 기준 세계 군사력 순위 25위에도 들지 못하는 북한을 단지 상대하기 위해 인구 1억 명도 되지 않는 한국이 미국-러시아-중국-인도 다음 가는 수준의 군사력(5위)를 반드시 보유해야만 하는 것일까?
군대는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군사력이 평화를 가져오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생각 자체에 있다. 군사력은 다른 국가와의 경제적 경쟁을 뒷받침하여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전쟁은 각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해질 때, 경제적 경쟁을 군사적 경쟁으로 전환할 때 일어난다. 군사력은 국가 사이의 경쟁 또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전쟁 억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 억지의 수단이 되지도 못한다. 예컨대, 세계 1차 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영국은 서로 비슷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 치달았다. 1999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피차 핵무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충돌로 나아갔다. 북한 정권이 한국과 미국의 군사력이 취약하다고 생각해서 신년부터 핵미사일 도발을 선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전쟁은 단순한 군사력 비교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치-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의 그 자체의 결과물이다. 그 어떤 전쟁도 국민들이 적대국과 자국의 군사력 수준을 비교해 합리적으로 승산을 계산한 뒤 민주적 투표를 통해 개시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특정 국가의 권력자들과 자산가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일방적 도박을 벌이는 것이 바로 전쟁이고, 결정권자들은 언제나 그럴듯한 말로 자신들의 결정을 사후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런 위험천만한 일에 동원되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고 석유를 얻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였고,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나토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였으며,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을 자신의 영토라고 거듭 선포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우크라이나, 대만 같은 작은 나라들이 군사력을 키우면 미국, 러시아, 중국 같은 강대국들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군사력으로 보장되는 평화’라는 구호는 얼핏 ‘상식’처럼 보이지만 전쟁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는 거리가 있다. 상호 군축을 통한 군사적 긴장의 완화와 대중의 전쟁 반대 운동에 의지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길이다. 더구나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역사에서, 군대는 지배계급의 국외의 ‘적’이 아닌 국내의 ‘적’을 제압하는 수단으로 종종 동원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역시 상명하복 질서에 따라 서울과 광주에서 국민을 상대로 총칼을 내세운 군대의 힘으로 수립되었다.
‘왜 안 가나’에서 ‘왜 가야 하는가’로
사실 류호정과 금태섭이 제기한 문제는, 가정 성평등이라는 거창한 포장지를 빼놓고 보면 남성들이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날 것의 박탈감 그 자체다. 왜 남성들만 적지 않은 시간을 군대에 끌려가서 보상도 없이 고생해야 하느냐? 하는 푸념 말이다. 군대에 가는 남성들은 1년 반에서 2년 동안 자신의 일상과 가족-친구들로부터 분리되어, 다른 개인의 일정과 계획을 미루고 원하지 않는 일에 종사해야 한다. 심지어 모두가 오고 싶지 않은 곳에 끌려온 것에 대한 분노와 의욕 없음은, 폭력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결국 자신보다 약한 하급자들에 대한 괴롭힘과 업무 전가 등 각종 군대 내 부조리로 표현된다. 군대에 가는 한국 남성들은 서로에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남성들의 정당한 불만이, 병역 대상자를 여성으로까지 늘리는 방식으로 해결될리는 만무하다. 이는 징병제의 폐해를 줄여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할 사람들의 범위를 늘리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여성 징병제 주장은 징병제 자체의 문제들을 가려버리는 대신, 여성을 희생양 삼아 남성들의 불만을 달래는 손 쉬운 방식으로 기능한다. 여성이 병역을 면제받는 모종의 사회 특권층인 것처럼 전제하면서 여성들이 현실에서 겪는 차별과 부조리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거나,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열등한 시민인것처럼 전제하면서 차별과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 류호정이 여성 징병제에 찬성하는 입장에 선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물론, 군대에 가고자 하는 여성들은 누구나 군대에 입대할 자유가 보장되어야하고(직업 선택의 자유), 그 여성이 군대에서 남성과 비교해 부당한 차별을 받거나 폭력에 노출될 때 여기에 반대하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또, 병역 의무를 ‘돈’을 매개로 빈곤층과 노동계급에게만 전가하는 모병제가 과연 징병제의 최선의 대안인지에 대한 고민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들은 여성 징병제에 대한 지지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남성들이 병역 의무에 대한 불만을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무원칙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한국 사회 징병제의 문제점과 평화에 대해 급진적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야말로 진보좌파의 진정한 소임일 것이다. [V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