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이 글은 “베프레터” (3월 셋째주 목요일 발행호)에 실렸던 <궁금해요, 맑스쌤>를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Q. 맑스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했지만, 현실의 많은 노동자들은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보수적이지 않나요. 그럼 일단 노동자들을 교육해서 의식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요?
A. 맑스는 모든 노동계급이 일시에 좌파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고 썼습니다. 사회의 지배 질서는 강제와 동의, 두 가지로 작동합니다. 강제는 질서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제재이고, 동의는 그 질서가 옳거나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은,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강화하는 정신적 생산수단(언론과 미디어, 공교육 제도, 대학, 출판, 예술 등)도 장악합니다. 그리고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를 활용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왕정이 국교로 채택한 카톨릭 교회가 “왕권 신수설”을 내세워 왕은 신의 대리인이라고 가르쳤듯이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한국이 196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을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 덕분이라고 서술하지,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눈물 덕분이라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독재 정부가 민주화와 노동조합 활동을 억압해 평범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쥐어짠 것이 경제 성장의 핵심 비결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언론도 사주들이 속한 계급의 이해관계와 신념을 대변하는 얘기들을 찍어냅니다. <한국경제> 같은 신문은 주식의 거의 80%를 대기업(그 중에서도 현대자동차와 현대계열 그룹사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노동자들 입장에서의 보도를 할 리 없습니다.
맑스는 단순히 이런 지배계급이 퍼트리는 생각에 노동자들이 아무 생각없이 ‘세뇌’된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삶의 경험들도 이런 생각들이 옳은 것처럼 뒷받침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컨대, 경쟁이 인간 본성에 부합한다는 생각은, 실제로 경쟁이 사회운영 방식으로 지배적인 사회에서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모두가 항상 경쟁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와 반대로, ‘개인의 삶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당연히 맞는 말로 받아들여지지만, 사회복지제도가 탄탄한 나라의 대중에게는 이상한 얘기로 들립니다. 그들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대중을 교육을 통해 먼저 바꾸어야 사회가 바뀐다는 생각은, 해답 없는 순환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에 미치는 강력한 힘을 그대로 둔다면,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맞는 말처럼 확인시켜주는 일상의 경험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도 노동계급 다수의 생각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맑스주의자들도 교육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활동가나 사회변화를 원하는 노동자나 시민들에게는 다양한 교육과 토론이 필요합니다. 맑스주의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교육이 그 자체로 사회 변화의 전략 또는 핵심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교육이 먼저 있어야 비로소 사회 변화나 투쟁도 벌어진다는 생각입니다(계몽주의). 반대로, 교육은 그 교육의 메시지나 주제에 이미 충분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서 닿을 수 있습니다. 교육보다 훨씬 중요하고 효과적인 의식 변화의 수단은 “투쟁”, 저항적 실천입니다. 투쟁은 단지 진보적 의식 때문이 아니라, 부정의에 대한 직관적 분노나 자신의 이해관계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작됩니다. 보수적 의식도, 분노와 불만을 막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운동은 노동계급 전부가 아닌 일부에게서, 때로는 극히 소수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투쟁을 시작한 노동자들은, 투쟁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투쟁 과정의 경험을 통해 그동안 기업과 정부, 언론이 하던 말들이 거짓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원래 투쟁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던 불만보다 더 많은 것들을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원래 해고는 어쩔 수 없는 것”, “회사의 소유자와 경영자는 회사를 자유롭게 운영할 권리가 있다”는 등의 말은, 해고 때문에 삶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에게는 더 이상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에 맞서 저항하고 때로 그것을 막아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해고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됩니다.
한 편, 투쟁은 지배계급이 장악하고 있는 제도 교육을 바꾸려고 할 때에도 필수적입니다. 제도 교육 안에 진보적인 내용을 추가해야 한다거나, 대안적인 방향으로 ‘제도 교육’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교의 성교육에서 성평등한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죠. 교육 제도 자체가 갑자기 이런 요구를 알아서 받아들일 리 없다면, 이를 바꿀 수밖에 없게 하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 자체도, 노동계급 투쟁이나 여성 운동 등의 목소리가 평소 강할 때 비로소 힘이 실릴 수 있을 것입니다.[V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