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과 자본주의

[편집자] 이 글은 2월 21일 열린 이달의포럼, [“저 달이 차기 전에” 공동체 상영회 ; <국가폭력과 자본주의>]에서 발제 및 토론한 내용을 정리하여 옮긴 것입니다.

우리는 2009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참혹한 국가폭력을 목격했습니다. 헬기에서 쏟아지는 최루액, 방패를 들고 돌진하는 특공대, 단절된 전기와 물, 그리고 고립되어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국가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경찰은 왜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은 전제가 틀렸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국가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본질 ; ‘특수한 무장 부대’

국가는 태초부터 존재해 온 것이 아닙니다. 국가 없이도 사회는 존재했으며,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개념이 없던 사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면서 국가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국가를 ‘계급 대립이 화해 불가능해졌을 때 등장하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조직된 기구’라 정의했습니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 충돌할 때, 지배 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영속화하기 위해 ‘중립적인 척’하는 기구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것입니다.

국가는 영토를 기준으로 국민을 구분하며, 군대, 경찰, 검찰, 법원과 같은 강제기관을 갖춥니다. 역사적으로 왕정, 귀족정, 정부와 의회 등 권력의 모습도 다양하고, 국가 권력의 우두머리를 정하는 법도 조금씩 달랐지만, 모든 국가는 예외없이 물리적 강제기관을 가졌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이를 통해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노동력 착취가 가능하도록 시장 질서를 유지합니다. 즉, 국가는 갈등을 해결하는 곳이 아닙니다. 피지배 계급(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물리적으로 누르고, 자본가의 착취를 ‘질서’라는 이름으로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지배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갈등을 ‘억압’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국가의 핵심은 의회나 투표함이 아니라 ‘특수한 무장부대(경찰, 군대, 감옥)’라고 정의했습니다. 평상시 자본주의 국가는 복지와 교육이라는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자본의 근간이 위협받는 순간 즉시 그 가면을 벗고 물리적 폭력을 드러냅니다. 쌍용차 공장에 투입된 특공대는 국가의 ‘실수’가 아니라 국가의 ‘본질’ 그 자체였습니다.

국가 폭력의 양상과 폭력의 필연성

국가가 끊임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공고히 할 계급적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20년의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겠습니다.  2006년 대추리사태, 미군기지 이전 과정에서 주민들의 저항은 “불법 집회”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 지역 주민들에게 약속된 헌법상 재산권보다 “국가안보”라는 가치가 우선됨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2009년 쌍용자동차사태에서 국가는 기업의 경영 판단(정리해고)은 합법으로, 노동자의 저항(공장 점거)은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하며 물리력을 행사했습니다. 쌍용차 사태 몇 달 전 일어난 용산 참사에서도, 철거민들은 형사처벌 대상으로 취급되며 진압당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의 책임 회피와 유가족 사찰, 집회 탄압 등은 국가가 누구를 보호하는지 의문을 던졌습니다. 국가는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 벌어진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농민의 외침 역시 불법으로 규정하고 물리력을 사용하여 질서 유지를 정당화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연한 과잉 진압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국가의 ‘본분’이 수행된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당 정부냐, 국민의힘 계열 정부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부분 공권력 투입으로 끝났습니다. 그 결과, 두 정부에서 구속된 노동자 숫자는 각각 거의 1천 명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선거를 통해 정부가 바뀌어도 경제 질서나 노조 탄압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국가라는 기구 자체(관료, 법원, 경찰 등)가 시장과 재산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외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보아도 비슷한 사례들을 거듭 발견합니다. 미국에서도 최근 정부가 흑인을 살해하거나(Black Lives Matter 운동), 이민자 단속 중 시민을 살해(ICE 총격 사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국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2. 폭력은 예외가 아니라 위기 시 반복되는 통치 방식이다.
3. 자본의 이익이 ‘국익’과 ‘법질서’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4. 민중의 저항은 범죄화된다.
5. 물리적 폭력과 행정·사법적 폭력이 결합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사유재산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둡니다. 노동자의 파업이나 점거는 자본가에게 ‘재산권 침해’이며, 국가는 이를 막기 위해 노동자의 ‘생존권’을 짓밟을 법적 명분을 얻습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폭력은 더욱 교묘해집니다. 과거에는 물리적 폭력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라는 경제적 살인을 결합하여 노동계급의 투쟁 의지를 꺾어 놓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진압을 넘어선 ‘심리적 테러’의 성격을 갖습니다.

결론: 국가 기구의 파쇄와 노동자 권력 ㅡ ‘착한 국가’는 없다

단순히 선거로 정부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국가폭력을 멈출 수 없습니다. 민주당 정부가 자신들의 지지 기반과 통치 정책 때문에 당장은 국민의 힘 계열 정부보다 경찰을 이용하는 방식이 신중할 수 있지만, 쌍용차 사태에서처럼 노동자들이 자본에 맞서 단호히 싸우기 시작하면 결국 그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 기구는 자본가의 이익에 최적화되어 있으므로, 이를 수선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조직된 힘으로 파쇄해야 합니다.

국가폭력은 국가라는 괴물이 자본의 편에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할 경제적 이유가 사라질 때, 비로소 국가라는 억압 기구도 역사 속으로 사멸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오직 국가와 자본의 사슬을 끊어내는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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