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차별 없는 세상, 어떻게 만들까

[편집자 주] 6월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프라이드먼스·Pride Month)이다. 1969년 6월 28일, 경찰은 ‘스톤월’이라는 퀴어 주점을 급습하여 사회의 젠더 규범에 벗어난 모습을 한 사람들을 체포했다. 시민들은 경찰의 폭력에 대항하여 현장에서 시위를 4일간 지속했고, 이들의 용기는 사회의 뿌리 깊은 성소수자 차별에 저항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느새 5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은 만연하다. 무엇이 성소수자 차별을 만들고 있으며, 어떻게 이를 해소할 수 있을까? 6월 14일, 서울에서 26번째 열릴 퀴어문화축제를 맞이하여 살펴보았다.

성소수자는 이런 세상을 원한다. 자유롭게 성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생활하는 세상.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 않고 각자 편안한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세상. 그래서 내가 선택한 가족 형태로 인해 다양한 가능성이 박탈되지 않는 세상. 이렇게 평등한 세상이 진정으로 온다면, ‘나다운 모습’보다 ‘사회 규범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길 강제당하는 많은 이들이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몸담은 사회는 그 해방을 온 힘을 다해 가로막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행복과 자유를 빼앗고 있나.


혐오세력, 차별사회


우리 눈에 쉽게 보이는 1차 극복 상대는 ‘혐오세력’으로 대변되는 보수기독교 극우집단이다. 그들은 성소수자 혐오를 중심으로 정치세력화를 지속했고, 유서 깊은 ‘빨갱이’ 낙인찍기의 노하우를 활용해 성소수자의 인권증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국을 망하게 하는 북한의 책략이라고 주장한다. 혐오세력은 여전히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기세등등하다. 2024년 시청과 서울역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쳤고(경찰 추산 23만 명ˑ한편 2024년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자는 주최 추산 15만 명), 온라인 공론장에서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혐오하는 댓글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들과 한 편에 서 있는 주류 보수정당이 바로 우리의 2차 극복 상대이다. 이들은 극우집단의 혐오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동조하거나(국민의힘의 극우화), 무책임하게 방관한다(민주당의 ‘나중에’ 사회적 합의). 정당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혐오세력의 성장에 기여하고, 차별에 고통받는 성소수자의 인권을 깡그리 무시했다.


이렇게 혐오 논리가 과대대표되는 상황에서, 성소수자 시민들은 우리 사회의 각종 제도적 보호장치(결혼, 이혼, 상속, 보험제도, 주거, 의료, 노동권 등)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래서 성소수자는 그저 각자의 노력으로 자본주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삶이 나락으로 미끄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자로서 성소수자 여부와 무관하게 착취 속에서 고통받는다. 그러나 성소수자의 경우, 자본주의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나를 보호해 줄 안전그물에 비-성소수자보다 더 큰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는 꼴이다.

평등사회를 막아야 할, 누군가들의 이해관계

이처럼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부당한 현실을 바꿔내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권리들이 제도적으로 갖춰진다고 하더라도 천지가 개벽하듯이 모든 혐오와 차별이 사라진 해방세상이 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비-성소수자가 당연하게 누리는 법적-제도적 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 보장(혼인평등법·생활동반자법·비혼출산지원법), 군형법 92조의6 폐지, 전파매개법 폐지 등이 필요한 제도 변화의 대표적인 예시다.


그런데, 우리의 극복 상대인 주류 제도 정치권은 왜 그토록 성소수자 인권에 적대적일까? 왜 자유롭게 사랑하고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사회가 간섭하려 하는걸까? 그것은 결혼을 포함한 가족제도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현 체제를 유지하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기득권 세력은 성소수자(불온한 존재)가 그 가족제도를 위협한다고 인식한다.  노동자가 일터에 나와 노동하려면, 쉬고 먹고 자며 회복할 수 있도록 누군가 출산과 양육으로, 집안일로, 돌봄노동으로 지탱해 줘야 한다. 이러한 재생산 노동은 현직 노동자를 노동할 수 있게, 예비 노동자를 양성할 수 있게, 은퇴 노동자의 삶을 연명할 수 있게 하는 사회의 핵심 전제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나 공동체가 노동력 재생산을 책임지지 않는다. 체제 유지에 필요한 재생산 노동을 개별 가정에 전가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은 값싸게 노동력을 활용한다. 그렇게 절감한 돈은 자본의 이윤이 되고, 국가가 권력자와 부자를 지원하며 전쟁을 준비하는 돈으로 낭비된다. 개별 가정에서 “알아서”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게 하려면, 그것을 떠맡을 가족 내 여성에게 해당 역할을 일임하는 성역할 구분이 공고해야 하고, 가족에 대한 희생의 신성함을 찬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출산과 성역할 구분의 전제조건으로 가족의 형태를 ‘남녀 간의 결합’으로만 제한하는 조치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성애 정상가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와 자본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열렬하게 수호된다. 혐오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제도 정치권이 정치공학적 계산기를 두드리는 현실의 너머에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이윤 논리라는 뿌리가 있는 것이다.


대중운동의 필요성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소수자 인권증진을 요구하는 강한 대중운동이 필요하다. 성소수자의 삶을 개선하는 개혁은 단순히 주류 정치인들을 개별 접촉해 설득하고 구슬리고 읍소하는 노력만으로는 온전히 쟁취되기 어렵다. 국가와 자본이 현 가족제도에서 이득을 누리고 있어 그것을 고분고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개혁이 이뤄지려면, 정상가족제도와 성별 규범을 넘어서고자 하는 성소수자 당사자와 지지자들의 힘이 혐오세력의 힘보다 세다는 것을 국가와 자본이 분명히 느끼게 해줘야 가능하다. 즉, 사회 기득권이 기존 제도로 얻던 이득을 일부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거세게 압박하는 운동 조직과 행동, 광범한 연대가 있어야 한다.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계속 무시할 경우 체제가 엎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든다면, 차라리 불만을 처리해줘서(속도와 적용 범위, 대가 등을 기득권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하며)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안정적 관리 방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사회운동들도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함께 체제를 뒤흔들 만큼 강력해져야 한다. 국가와 자본이 시민들의 삶을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삼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힘을 합쳐야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보수 가톨릭 국가로 유명했던 아일랜드에서는 국민투표로 2015년 동성결혼이 허용됐고(62% 찬성), 자신이 원하는 성별에 일치하도록 법적 성별을 인정하는 “성별인정법”이 통과됐다. 이에 더해 2018년에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던 헌법 조항도 폐지됐다. 이렇게 제도적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1990년대 초부터 벌어진 임신 중단권 지지 운동, 가톨릭교회의 성적 학대와 폭력에 대한 폭로, 심지어 수도세 인상에 반대하는 대중 투쟁의 성장 등이 단단히 결합하여 기존 사회를 지배하던 교회 윤리와 보수적 성관념, 국가관 등을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체제에 저항하는 불온한 세력들이 뭉쳐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이러한 대중 운동의 성장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목표가 단지 법률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입법을 통해 개혁을 쟁취한다고 하더라도, 자본과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인권은 후퇴하고 개악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저항의 목소리에 못 이겨 제도 개선이라는 선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조건과 제한들이 덕지덕지 붙어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기네 힘이 더 강해지면 이를 다시 뺏어갈 수 있다. 백래시 세력은 호시탐탐 우리 곁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15년 연방대법원에서 동성혼 합헌 결정이 난 이후에도, 학교에서 동성애 교육을 금지하는 등 성소수자를 적대시하는 법안이 다수 통과된 바 있다. 소수자 인권에 열린 이미지가 있는 프랑스에서도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2010년대에 줄을 이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게다가 제도만 개선되었을 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지되는 정상가족 규범이 여전히 공고하다면, 동성혼이 법적으로는 쟁취되었더라도 개별 당사자는 두려운 사회적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각자의 지난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또, 경제적 조건에 따라 (마치 지금의 이성애 결혼처럼) 누군가는 여전히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제도는 여전히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해방 세상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단순히 법을 바꿔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운동이 강하게 성장해야 더 많은 사람의 생각과 문화도 변화할 수 있다. 그래야 백래시에도 언제든 맞서 싸울 힘이 생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연대하고, 더 큰 힘으로 결집하여 행동할 때 진정한 의미의 성소수자 해방이 가능하다. 성소수자의 인권이 증진되는 것이 단순히 성소수자만의 이해관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체제로부터 착취당하는 이들 모두 함께 싸울 동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공감대를 만들고 연결되어야 한다. 선거나 개별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기보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일관되고 속 시원하게 옹호하는 퀴어 자신의 운동은 물론, 더 많은 지지자를 행동으로 결집하는 집회와 시위를 건설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은 성적 권리와 사랑, 선택의 자유, 개인의 행복을 출생률과 노동력 재생산 비용으로만 셈하려 한다. 우리가 뭉친다면 이에 단호히 맞설 힘이 있다. 자본주의의 이윤 논리에 도전하는 수많은 운동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이 함께 만나야 한다. 우리에게는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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