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주, 대법원이 선을 넘었다. 대선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사건을 심리하기 시작한지 고작 9일만에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유죄를 선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법원 사건은 2심 재판 결과가 문제가 없다고 확인만 하는 경우에도 최소 서너달이 걸린다. 2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판결을 뒤집는 경우 빨라도 2년이 걸린다. 6~7만 쪽에 달하는 사건 기록을 대법관들이 9일 만에 모두 읽고 판결을 내릴 수 있었을까? 게다가 문재인 임명 대법관 2명과 윤석열 임명 나머지 대법관 10명이, 딱 그 숫자 그대로 이재명 무죄를 선고한 2심이 옳은지 그른지 의견이 갈렸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주도한 대법원장 조희대는 박근혜의 뇌물죄와 강요죄 재판 당시 모두 무죄를 주장한 ‘꼴’ 우익 판사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을 신뢰하지 않는다. 민주당 정부는 김대중 정부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개혁을 수행한 적이 없다. 민주당 정부는 소탈해보이고 개혁적 언사를 늘어놓는 인물들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왔지만, 그들은 정작 임기 중 노동자 서민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점잖은 말투로 ‘나중에’만 반복했다. 그들의 개혁 배신은 대중의 냉소를 낳았고, 그들이 안착시킨 신자유주의 질서는 차별과 혐오의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는 이재명 개인이 그가 연루된 여러 스캔들에서 그 자신이 주장하는 것만큼 흠결이 없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대법원이 다른 어느 때도 아닌 바로 이 시점에, 날림 판결로 전 국민에게 이재명의 흠결에 대해 선언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이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이겠는가. 쿠테타 실패로 대선에서 승리는커녕 체면 유지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김문수와 한덕수 같은 국힘 내란잔당들은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윤석열 탄핵으로 사기가 한풀 꺾였던 극우 세력들도 눈을 번뜩였을 것이다. 의회 다수당이자 대통령까지 장악한 민주당이, 조금이라도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법률을 통과시킬까 두려워했던 모든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이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대법원은 2심의 결론이 잘못됐다고 판결한 경우, 이를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 다시 재판을 열게 한다. 고등법원은 대법원의 판단 취지에 따라 사건을 다시 검토하여 그에 맞는 판결을 내리는데, 형사 재판의 경우 보통 피고인의 형량도 이 때 정해진다. 이번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이재명 후보의 형량을 직접 정하지 않고, 고등법원이 판단하도록 돌려보냈다. 만일 고등법원에서 이재명 후보의 형량이 벌금 1백만원 이상으로 정해지면, 선거법 규정 상 모든 공직자 선거에 10년 동안 출마할 자격을 잃게 된다.
고등법원이 사건의 첫 재판 일을 대선 이후로 잡았으므로(6월 18일), 이재명 후보가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대선 전에 후보 자격을 잃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 기간 내내 대법원 판결은 내란세력의 기를 살려줄 것이다. 선거 후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현직 대통령에 대한 법원 재판이 진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극우의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재직 전의 일로 임기 중 형사재판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 자체가 헌법상 논란이 되겠지만, 법원이 작정하고 이를 밀어붙인다면 그 자체로 정국은 요동칠 수 있다. 만일 그 재판이 벌금 백만 원 이상의 유죄 판결로 끝난다면, 현직 대통령은 애초에 후보 자격도 없었던 사람으로 전락할테니 말이다.
결국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내란 세력을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심화하려는 대중의 개혁 열망에 찬 물을 끼얹으려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농단에서도 이미 드러났지만, 법원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기관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수적 세계관 위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지금 대법원을 장악한 자들은 이번 판결로 자신들이 가진 힘을 한국 사회 전반에 한껏 과시하고 있다.
대법원만 문제가 아니다. 법원 일반, 검찰, 경찰 등 ‘법치’를 말하는 모든 기관들이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내란범 윤석열이 증거를 인멸할 수 있도록 구치소에서 풀어준 영장 전담 판사의 황당한 판결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윤석열의 경호처장 김성훈에 대해 영장 신청을 계속해서 반려하던 검찰이, 윤석열 탄핵 몇 주만에 갑자기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 일은 또 어땠는가. 관저농성을 하던 윤석열에게 설설 기던 경찰이 남태령에서 밤을 샌 농민들에게 신속하게 출석 요구서를 보낸 일도 있었다.
놀랍게도, 한국 정치 상황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 이 기관들은 대중의 어떠한 민주적 통제로부터도 자유롭다. 대법관도, 판사도, 검찰총장도, 경찰청장도 대중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소환되지도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도 보는 것처럼, 선출되지 않은 12명 대법관 판결이 4,400만 명 유권자의 투표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이재명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한 말이 어디까지 허위사실이고 어디까지 진실이냐 하는 문제보다, 그러한 판단을 누가 하는지의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 이재명의 거짓말이든, 부정부패든, 정책공약이든, 심지어 미래에 있을 그의 배신조차도 오직 대중이 판단하고 심판할 대상이다. 대중의 선택보다, 지배계급 안에서의 아귀 다툼이 큰 힘을 갖는 사회가 어떤 의미에서 민주적이라 할 수 있는가.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역설적으로 선거날만 기다렸다 투표하는 것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개혁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우리가 그저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권력자들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사회를 보수화하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거 전부터 민의를 거스르고 왜곡하려는 모든 시도는, 선거 이후 사회개혁을 저지하기 위한 온갖 준동으로 연결될 것이다. 선출되지 않은 기성 권력과 극우 세력에 맞서 개혁 동력을 지켜내려면, 운동을 만들고 참여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든, 이번 대선에서 누구에게 투표하든, 그러한 투쟁을 위한 단결과 행동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V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