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
 25일 국회에서 열린 한성숙 총리 후보자 청문회에서도

25일 국회에서 열린 한성숙 총리 후보자 청문회에서도 “주적”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채널A

주적이 대체 뭔데요

지방선거 이전부터 극우들과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 사이에서는 주적을 묻는 질문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주적을 북한이라고 하지 않으면 사상이 의심된다는 취지였습니다. 지방선거 운동 기간에는 거리 유세 중인 민주당 후보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영상으로 올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부실선거 이후 올림픽공원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주적이 북한이고 김정은과 시진핑을 상대로 욕설을 할 수 있어야 시위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주적(主敵)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휴전 이후 수십년 동안 “북한의 위협”은 군사독재 정부의 모든 문제를 덮고 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명분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적이라는 단어는 독재 정부가 무너지고 나서야 등장했습니다. 1994년 제네바 핵 협상 당시 북한 당국자로부터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온 것이 계기였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김영삼 정권이 1995년 국방부가 발행하는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이라고 활자로 명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1996년 강릉에 무장공비가 잠수함을 타고 침투한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김대중 정권에서도 주적이라는 표현은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2004년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주적이라는 표현 대신 ‘직접적 군사위협’,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되지만, 이후에도 정부가 바뀔 때마다 표현은 엎치락뒤치락 변화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김영삼이 발견한 주적이라는 개념은 냉전적인 우파들을 단결시키는 주문이 되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상대로 우파들은 늘 주적이 누구냐를 물었고, 김대중과 노무현은 수세적으로 북한이라고 대답하거나 모호하게 답변하는 식으로 응대했습니다. 기세등등한 우파들은 민주당 정권의 약한 고리로 주적 개념을 가져오기 일쑤였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로 고령층과 보수층을 지지세력으로 결집하고,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기성권력과 지배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무기가 된 것입니다. 

민주당이 생각하는 “주적”

그러나 민주당은 이런 ‘주적’ 개념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한국 자본가들의 다른 노선을 대변하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계열 정부가 추구하고 대변하는 것은 국민의힘 계열 정부가 추진해 온 개발독재가 아닌 ‘시장 독재’입니다. 정부가 기업가들 위에 군림하기보다 한 발 뒤에서 그들의 뒤를 봐주는 일에 집중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여 오히려 제도 정치 안에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통제합니다. 무엇보다,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발맞추어 미국 뿐 아니라 미국의 경쟁자인 중국과도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은 한국 자본가들 다수의 이익과도 일치합니다. 이미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기업들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는 미국에 대한 것만큼이나 늘어났습니다. 

남북관계에 대한 양 정치세력의 입장 차이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습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국민의힘 계열 정부에게 탄압당하면서 지겨울 정도로 친북이라는 꼬리표에 시달려왔으므로, 국민의힘과 같은 ‘북한 혐오’를 공유할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이 되는 한에서 남북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부터 개성공단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은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을 추진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한미간 이해관계 충돌로 비화될 수 있는 대북제재 문제에 이르면, 항상 북한보다 미국을 우선시해왔지만 말입니다. 남한의 자본주의가 여전히 워낙 미국과 단단히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민주당이 북한과의 경제협력이나 평화 문제에서도 일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주국방?

사실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일반적 이익에 따르면, “주적”을 두지 않는 편이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다. 북한을 주적으로 선언하기에는 남한이 진정 견제하고 경쟁해야 할 다른 국가가 많습니다. 이런 상대들에는 심지어 전통적 우방이라고 불리는 나라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통해 이익을 취해야 한다면, 미국도 중국도 상황에 따라 동맹이자 ‘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주적이라고 고정시켜둔다면,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을 얘기하며 자국 병력을 한반도에서 이동시키려 할 때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독자적 군비확충에 나서는 것을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 자본주의는 북한을 이미 압도하고도 남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고, 앞으로는 동북아 전체가 군사경쟁으로 흘러갈 상황을 대비해야 할 상황입니다. 중국과 일본을 상대하더라도 막심한 피해를 줄 수 있도록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고, 미국 지배계급의 이익과는 별도로 자국 군사력을 최대한 자유롭게 운영할 권리를 확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이렇게 변화한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에 주적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2025. 10.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2025. 10.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습니다. ⓒ중앙일보

물론, 호전적인 남한의 군부와 극우세력 역시 민주당이 내세우는 자주국방에 동조할 때가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즉시 그에 개입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가리지 않고 집권세력은 자주국방이라는 명목 하에 매년 한국의 군사력을 괴물처럼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우익들이 민주당과 선을 긋는 것은 자주국방이 한국인들에게 줄 ‘잘못된’ 메시지를 통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주국방이라는 논리가 조금이라도 주한미군철수와 같이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주장에 틈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유용한 개념으로 우파들이 재발굴한 것이 바로 “주적”입니다. 주적을 북한이라고 명확하게 답변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들은 곧 한미동맹 와해를 노리는 세력이며 중국이나 북한의 간첩과도 다를 바 없다는 논리를 개발한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주적

그렇다면 극우들이 묻는 말에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요? 민주당 정치인들은 주적 개념이 더 이상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곤 합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더 이상 냉전주의적인 남북대립보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긴장과 대립에 반대한다는 면에서는, 좌파들 역시 북한이 한국 정부의 (주)적으로 취급되는 것에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북한 정권은 독재 정권이고 북한 민중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무너져야 할 대상이지만, 한국의 지배계급과 우파들이 북한 정권을 비난하고 군사적 긴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은 북한 민중들이 저항을 발전시키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 정치인들의 말 속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적수는 이제 더 이상 북한이 아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진정 견제하고 경쟁할 대상은 다른 곳에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독일의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가 명확하게 말한 바 있습니다. 노동계급의 “주적은 국내에 있다”고 말입니다. 국제 컨설팅 업체 머서가 2023년 세계 주요 227개 도시 생계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은 전세계에서 생계비가 16번째로 비싼 도시이지만 삶의 질은 81위에 불과했습니다. 최저임금인상률은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해서,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날로 삭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사용자대표들은 최저임금 10,320원 동결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용자대표들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주적’입니다.

한편, 박근혜 퇴진 이후 집권한 문재인은 집권 첫 해에 최저임금을 16.4% 올렸고, 윤석열조차 첫 해에는 5.0% 인상한 바 있습니다. 반면 이재명 정부는 집권 첫 해에 2.9% 인상에 그쳤습니다. 올해도 정부에서 나온 공익위원들은 노동자들의 편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저임금 인상에는 이토록 인색한 정부가 ‘새로운 적’들을 겨냥한 국방비 증액에는 매우 열정적입니다. 올해 국방 예산은 전년 대비 무려 8.2%나 증가한 66조 3천억 원입니다. 이것이 법정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1/8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 추세를 스스로 뒤집지 않는다면, 정부도 평범한 사람들의 주적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들

우리는 극우들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미국이든 어느 나라든 그 정부는 그 나라 기업들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대변하기 위해 군사력에 돈을 쏟아붓고, 실제로 그 군사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베네수엘라, 이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고,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돈이 낭비됩니다. 세계에는 이런 야만적인 군사 경쟁을 필요로 하는 계급과, 그 경쟁에서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하는 계급, 오직 둘이 존재할 뿐입니다.

최근 성과급 파업 등에서 보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기업과 정부에게 자기 몫을 요구하며 행동에 나서게 되면, 극우들의 주적 챌린지에 대한 노동계급의 진정한 답이 무엇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 ‘주적’ 문제와 관련해 얘기하자면, 좌파들은 민주당 정부와 달리 일관되게 군축을 요구해야 합니다. 특히,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여 복지 예산 증대에 사용할 것을 분명히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국방”에 반대해야 하고, “한미동맹 해체”나 “주한미군 철수”, “한미일 군사협력 확대 반대”, “한미군사연합 훈련반대” 등의 요구를 지지해야 합니다.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에 위협이 되는 모든 형태의 군사적 긴장 조성에 반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민주당과도 선명한 차이를 갖는 좌파적 대안을 분명히 하는 것이야말로, 극우와 우파들에 맞선 가장 효과적인 대응의 출발이 될 것입니다.[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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