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전국이 민주주의를 외쳤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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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시작: 호헌 조치

군사정권의 압제가 27년째 드리우고 있었던 1987년은 정치적 분기점이 되기에 충분한 시점이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제8차 개정헌법에 의해서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정했고, 1987년은 그 마지막 해였습니다. 군부독재 종식을 외치는 학생운동은 1987년 새해 벽두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은 학생운동 관련 인물의 소재를 추궁받는 과정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고 물고문을 당하면서 1월 14일에 사망하였습니다. 경찰과 정권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했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사망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더해 임기를 마치고도 군사정권을 이어가길 바랐던 전두환은 4월 13일 “헌법 개정은 없다”는 호헌(護憲)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호헌 조치의 핵심은 간선제 유지였습니다. 유력한 2인자로 떠오른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직선제를 바라던 대중의 분노가 쌓이던 차에,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추모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처음 밝힌 것과 달리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닌 5명이었으며, 경찰이 이후에도 조직적으로 사건을 축소시키려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광주를 폭압적으로 짓밟고 권력자가 된 전두환은 광주항쟁 7주기 추모 미사에서 폭로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한열 열사 사망과 확대되는 시위

그럼에도 전두환은 6월 10일로 예정된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지명식에서 예정대로 노태우를 지명하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러자 노태우 후보 지명과 호헌 시도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앞장섰습니다. 교문에서는 매일같이 몰려드는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이어졌고 최루탄 가스가 진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6월 9일 연세대 정문에서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직격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은 경찰 폭력에 분노한 시위대가 모여든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6월 10일, 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는 전국 20여 개 도시, 수십만 명의 규모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경찰력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명백해지자 전두환은 군대 소집을 검토했습니다. 6월 18일에 부산에서 30만 명 규모의 시위대가 운집하자 6월 19일 군 고위 회의가 개최되어 부산 지역 위수령을 선포하는 것이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대비하여 수도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충정부대(서울 인근 17사단, 20사단, 30사단을 통칭)’를 서울 주변으로 집결시켰고, 부대는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렸습니다.

쓰러진 이한열 열사, 그의 희생 이후 투쟁은 더욱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지배계급의 분열

시위대 지도부는 명동성당에 집결해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성당 안 진입을 꺼렸습니다. 명동성당을 무력으로 침탈했다가는 다음 해 서울올림픽에서 가톨릭권 국가들이 반발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습니다. 미국의 지원도 이번에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1980년 당시 침묵으로 사실상 광주의 무장 점령을 승인했던 미국이 이번에는 전두환의 무력 진압 시도를 막아섰습니다. 레이건은 직접 친서를 보내서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만큼 시위가 전국적이었고 전두환의 인기가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게다가 군대 내부에서조차 병력 투입에 회의적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군부는 전두환의 직접 통제 하에 있었고, 공세적으로 항쟁을 진압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롭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회 출신 보안사령관 고명승과 특전사령관 민병돈부터 병력 투입에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까지도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노태우가 더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전두환이 흘리게 만든 시민들의 피가 이후 노태우에게도 묻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시위가 전국을 휩쓴 19일 동안 권력층은 완전히 분열했습니다.

결국 노태우가 건의하고 전두환이 수용하는 형식을 취한 6·29 선언은 그렇게 발표되었습니다.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선거법 개정, 김대중 석방 등 굵직한 양보 조치를 내놓았으며, 이를 전두환과 민정당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 후보 및 모든 공직을 사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였고, 결국 호헌 조치는 철폐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개헌 논의가 발족하게 됩니다.

노태우 집권으로 6월 항쟁의 의미는 퇴색되었나

당시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6월 항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후 직선제로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그 의의가 상당 부분 퇴색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노태우의 당선은 많은 사람에게 실망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더욱이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는 민주화운동에 열정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율을 더하면 55.07%로, 노태우의 36.64%를 훨씬 상회했습니다. 결국 김영삼이 전면에 내세웠던 ‘군정 종식’은 결국 5년을 더 기다리고서야 김영삼 집권으로 실현되었고, 이는 일종의 ‘지연된 정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6월 항쟁의 의의가 반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6월 항쟁은 남한에 “자유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결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장기적인 운동으로서 민주화 투쟁은 87년 6월 항쟁으로 결집되어 군부정권을 몰아냈습니다. 설사 노태우가 당장은 집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더라도 그는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이었고, 임기가 끝나자 실제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이전과 같은 군부독재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노태우는 한동안 여소야대의 국회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권력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고, 이후 김영삼과 김종필의 손을 잡은 3당 합당을 통해서야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무소불위의 단일 권력 체제가, 정치적 지배계급 사이에서 분열, 경쟁과 견제가 존재하는 제도 정치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 노태우의 당선 직후 몰려왔던 당대 활동가들의 회의감과 패배감은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투쟁의 객관적인 역사적 의의는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지배계급 사이의 분화와 권력 집단의 교체 가능성이 그 자체로 노동계급에게 개혁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사이의 경쟁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더 활성화되거나 운동이 확대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가는 길

더 중요한 의의도 있습니다. 이 항쟁을 계기로 드디어 한국의 노동계급이라는 거인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87년 6월 항쟁 이전에 벌어졌던 반독재 투쟁에서 결여되었던 것이 있었다면 바로 노동계급의 대중 투쟁이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도 초반에는 여느 투쟁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과 재야단체의 결합으로 시작되었지만, 투쟁의 동력은 단지 이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당시에 ‘넥타이 부대’라고 불렸던 노동자들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전국의 시위에서는 언제나 퇴근 후 합류하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함께 주요 대열을 형성했습니다.

또, 노동자들은 6월 항쟁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어진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투쟁에 대거 나섰습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은 임금 대폭 인상을 쟁취했을 뿐 아니라, 작업장의 ‘민주주의’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및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첫째 요구인 두발 자유와 복장 자율화를 쟁취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억눌려온 작업장 내 규율을 타파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사측에 관철시킬 동력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민주노총 또한 87년 투쟁의 경험을 바탕에 두지 않았다면 결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이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노동자들이 가을의 투쟁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굳히기’를 해냈다는 데에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노동조합 등의 세력으로 조직화하고 그들이 가진 힘을 지배계급에게 보여줌으로써, 6월 시위가 잦아든 틈에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다시 백래시를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습니다. 사실 직선제 쟁취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고, 재야의 정치세력은 이를 순순히 따른 상태였습니다. 1980년 서울역 회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없었다면 바로 반동의 칼날이 들이밀어졌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87년 가을 김영삼은 “경제를 해치는 무질서”라며 노동자 대투쟁을 비난했습니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은 비로소 가을의 노동자 대투쟁과 만나 지금의 의미를 온전히 가질 수 있었음이 명백합니다.

1987년 가을, 울산 시내를 가득 메워 행진하는 파업 노동자들

투표용지 한 장, 그 다음의 “민주주의”는?

한편, 87년 가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주주의가 대중에게 경험으로 학습된 핵심적 계기였습니다. 노동자 대중은 가장 자신의 피부에 와닿고 중요한 불만, 즉 작업장에서 겪는 문제를 투쟁을 통해 실질적 변화로 이끌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노동계급에게 곧장 새로운 문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모든 국민이 한 표를 직접 행사하는 대통령 선거로 표현된다면, 경제적·사회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일까요? 투표용지 한 장을 피 흘려 얻었지만, 그렇게 뽑은 권력이 내 실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직선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누구를 뽑아도 결국 국가가 기업의 편에 선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실패한 투쟁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성공한 투쟁에서도 한계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번 투쟁에 필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87년도 6월 항쟁의 의의는 분명합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는 우리 사회 전면에 등장한 노동계급의 소중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승리는 미완이라는 점도 덧붙여야 합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은 노동자 계급 대중 조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저항과 힘을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안정적 유지에 불가피할 때, 노동계급의 참정권을 인정함으로써 이들을 자본주의의 정치 구조 안에 포함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지배계급은 이 시스템 위에서 노동계급이 지지하는 정당의 지도자 또는 노동계급이 조직한 노동조합의 대표자를 포섭하여, 그들의 중재를 통해 노동계급의 저항을 일정 수준 이하로 진정시키려 합니다. 노동계급 대중에게 마지못해 투표권을 한 발 양보하는 대신(영국에서도 보통선거권이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에게 인정되기까지 140여 년의 투쟁이 필요했습니다), ‘동의에 의한 지배’를 통해 체제 관리를 더 정교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좌파 활동가들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지, 노동계급의 의식이 어떻게 더 나아간 진짜 민주주의로 향하도록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지배계급과 ‘장군멍군’을 영원히 반복하는 대신, ‘체크메이트’로 경기를 완전히 승리로 끝내려는 관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향한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이 이 체제의 중심에 다시 설 때, 87년 6월 항쟁은 그 위대한 시작으로서 다시금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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