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향신문
[편집자] 오늘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지 46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난 주 연재에 이어, 광주민중항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게 되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광주의 경험에서 특히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해보려 합니다.
1980년 5월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전국적 휴교령을 내리고 공격을 시작했을 때,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곳이 바로 광주였습니다. 광주의 저항이 더 격렬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광주는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박정희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호남 지역은 방치하다시피 했습니다. 둘째, 호남과 광주는 김대중의 생물학적, 정치적 고향이었습니다. 지역의 상징적 인물, 그것도 민주화 운동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김대중이었기에, 그에 대한 정부의 구금은 곧 광주 시민을 향한 공격으로 여겨졌습니다.
5월 18일부터 집단 발포 전까지
광주에서는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전, 이미 계엄 확대 시 행동지침(전남대 앞 10시 집결 집회)이 예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오전 대학 휴교령이 떨어졌지만, 학생들은 예정대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곤봉으로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전남도청으로 이동했고, 진압 소식이 전해진 오후부터는 시위 규모가 훨씬 커졌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이제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공식 집계만 보더라도 이 때 대학생 114명, 고교생 6명, 일반 시민 184명 등 총 405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이들 중 68명이 다쳤고 12명은 중태였습니다. 아마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다쳤을 것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전두환은 더 많은 병력을 광주로 보냈습니다. 11공수여단은 광주에 가는 길에 “간첩을 잡는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5월 19일이 되자 시위대의 중심은 대학생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뀌었고, 시위는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공수부대의 진압 수단도 곤봉에서 대검으로 더욱 잔혹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5월 20일, 이제 시위 참석 인원은 약 20만 명까지 확대됩니다. 당시 광주 인구가 채 80만 명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광주에서 시위와 무관한 집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거짓으로 보도하는 언론사에 분노한 시위대는 광주 MBC와 KBS를 불태웠습니다. 외신만이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여 유럽과 미국에 광주항쟁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국민에게 총을 쏘는 국가 vs “광주꼬뮌”
사태가 계속 커지자, 전두환은 이제 집단 발포를 통해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습니다. 항쟁의 규모가 더욱 커져 30만 명을 헤아리게 된 바로 그 시점에,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는 대규모 총격을 자행했습니다. 오후 1시를 기해 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리자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5월 21일 하루에만 54명의 사망자와 500여 명의 총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집단 발포로 희생자가 생기자 분노한 시위대는 5월 21일부터 직접 광주를 빠져나가 다른 곳에 광주의 사정을 알리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주, 영암, 담양 등 인근 지역으로 빠져나갔던 시위대는 광주의 실상을 전달함과 동시에, 이제 무장 저항을 위해 경찰서 등 무기가 있는 곳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장이 시작됐고, 이제 시민들은 ‘시민군’으로서 계엄군과 교전했습니다. 국민을 살해하는 국가 대신, 민주주의와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시민군을 초기 진압하는 데 실패한 계엄군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일단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모두 차단했습니다. 또, 광주에서 폭도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보도를 전국으로 계속 내보내면서 다른 지역 시민들의 눈과 귀를 왜곡시켰습니다. 그러나 폭도들이 장악하고 있다던 광주는 평소보다 오히려 낮은 범죄율을 기록했습니다. 스스로 광주의 주인이 되어 일어난 시민들은 부상자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혈하는 대열에 섰고, 기꺼이 먹을 것과 필요한 물품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광주를 운영한 것입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위대한 저항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잠시나마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기름을 나눠서 사용하던 모습을 그린 영화 <택시 운사>의 한 장면
협상만이 살 길이다?
그렇지만 계엄군은 광주를 해방공간으로 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격을 지속하면서 광주를 압박했습니다. 이에 위축된 광주의 일부 종교 지도자와 지역 정치인들은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계속할 것인지, 무엇을 새로 시도할 것인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계엄군과 협상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철수 없이 일방적으로 무장을 해제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고 맞섰습니다. 계엄군이 협상할 생각도 없고 협상을 통해 얻을 이익도 없는 상황에서, ‘협상파’는 협상을 강제할 어떤 수단도 없이 협상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실제로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무장해제만을 요구할 뿐 진압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병력을 광주로 증파해, 최종적으로 약 2만 명의 군대로 광주를 포위하게 했습니다. 시민군은 겨우 경찰서에서 빼앗은 소총 등으로 무장했을 뿐이었는데, 이 정도 규모의 군대가 본격적 진압 작전을 펼친다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근거로 사실상 항복에 다름 없는 협상을 주장하고, 다른 누군가는 협상의 무망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광주의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교섭’은 예상대로 결렬되었습니다.
5월 25일, 계엄군은 마지막으로 시민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도청에 있던 시민군은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항쟁 지도부를 결성했고,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오늘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맹세를 지켰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예언을 현실화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중무장한 계엄군이 탱크까지 몰고 와서 도청 앞을 완전히 포위한 뒤 도청을 진입했지만, 시민군은 문을 잠그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것입니다.
군사적 패배, 그러나
시민군은 결국 군사적으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도청은 계엄군에 장악되었고, 연행자는 200명에 이르렀습니다. 27일 당일 사망자로 추정되는 숫자는 160명에서 최대 400명 정도입니다. 당시 광주시 사망신고 수는 월평균 2,300명이었는데, 1980년 5월에는 4,900명이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당시 광주에서 600명에서 최대 2천 명까지 사망자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 직후 외신 기자가 촬영한 시민군 사망자 사진,
2021년 5·18단체와 유족들은 사진을 공개하는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최후의 진압작전에서 계엄군은 시민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력은 자국민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며 어떤 정당성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광주항쟁을 진압한 후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그 역시 어떤 정당성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전두환의 노력과 별개로, 광주항쟁의 진실은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전두환의 통치 기간 내내 가장 큰 적수였던 학생운동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폭력은 수많은 활동가들의 이념적 급진화를 이끌었고(특히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서 정작 국가폭력 범죄자인 신군부를 지지한 미국의 위선에 대한 반대 정서가 커졌습니다), 마침내 전두환과 군사정권에 대한 대중의 공분을 만들어 냈습니다.
전두환에게 광주는 그가 권력을 잃은 뒤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낙인이 되었습니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구속 투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떠올리며 그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1심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한편, 전두환이 몰래 광주 근처인 담양을 방문해 이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운 일이 있었는데, 87년 민주화 항쟁 승리 이후 광주 시민들은 이 비석을 박살내고 전두환의 이름이 새겨진 돌판을 광주항쟁 희생자 묘역 입구에 묻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광주항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상징적 행위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 다른 길이 있었을까
한편, 많은 사람들이 광주항쟁의 국가폭력, 특히 잔혹한 마지막 진압과 희생이 일어나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자문하기도 합니다. 특히, 당시 협상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결국은 시민군이 최대한 유리한 조건에서 스스로 항복하는 것이 불가피한 차악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투쟁의 길이 있었는지 고민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 물음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좌파들로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5월 18일 전남대학교 앞에 대학생들이 모이기 이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안적 경로의 가능성입니다. 광주보다 먼저 서울에서 대규모 전두환 반대 시위가 있고, 그런 대중 투쟁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전두환의 반격이 이루어졌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런 상황이 될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학생 10만여 명이 모였었으니까요. 이 날 이후 서울에서 투쟁이 계속됐다면, 전두환이 과연 손쉽게 기습적 비상계엄 확대에 성공했을까요? 설령 그가 비상계엄 확대를 강행했을 때조차, 서울도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엄 확대 시 행동 요령(투쟁 지침)을 미리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대중의 분노와 이를 대변하는 행동계획이 있었다면, 서울에서도 5월 18일의 광주처럼 대규모 시위가 계속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대학생이 시민들 다수를 시위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서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면, 신군부는 병력을 광주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서울역에 모였던 학생들의 지도부는 ‘군부에 빌미를 주지 않겠다’며 자진해산했고 다음날부터 속수무책으로 전두환에게 역공을 당했습니다. 광주의 비극은 운동의 방향성, 리더십이 전체 운동과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 것입니다.
둘째, 5월 18일 전남대학교 앞에 대학생들이 모인 이후 시점에 대한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전국의 대도시 시민들, 노동자들이 알게 되고 연대에 나섰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1980년의 한국은 교통과 통신, 언론의 기술적-정치적 제약이 지금보다 훨씬 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두환 군부는 5월 21일 이후 광주를 물리적으로, 통신상으로 완전히 단절시켰습니다. 그러나 군부의 이런 봉쇄 시도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부마항쟁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독재 정부는 언제나 저항의 소식을 차단하고 사건을 왜곡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만일 광주에 이러한 봉쇄에 대비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전국적 투쟁 조직이 있었다면, 사건은 얼마간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광주가 고립되던 시점에서는 학생운동도 그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서울권에서는 총학생회 연합 등의 조직적 체계가 있었으나 전국적 연결은 아직 느슨한 상태였습니다. 저항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미리 알기 어렵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저항을 연결하고 연대를 키울 수 있는 조직은 항상 미리 건설되어야 합니다.
광주를 돌아보며
광주항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또 다른 생각할 거리도 있습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광주와 호남의 대중은 김대중을 정치적 상징으로 여기며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광주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거나 진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광주항쟁 당시 김대중 자신은 감금되어 있었을뿐더러, 그와 가까웠던 광주의 토착세력은 항쟁 당시 중재를 구실로 시민군의 무장 저항을 포기시키려 했습니다. 김대중 역시 대통령이 되어 집권한 후 감옥에 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해주었습니다. 영호남 통합을 위한 국민적 메시지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이에 분노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김대중을 자신들의 정치적 상징으로 여기는 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김대중이 아니고서는 광주와 호남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민들의 대안 부재감과 그로 인한 ‘엇나간 지지’는, 단순히 광주라는 지역 또는 김대중 개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김대중과 그 후예들의 정당인 민주당은 일관된 민주주의 옹호자들도 친노동 세력도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윤석열의 내란 시도와 국민의힘의 극우화에 반감을 가지면서 ‘그래도 민주당이 아니고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혀 대변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곤 합니다. 그들이 노동과 자본의 갈등을 중재한다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단시키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며 무원칙하게 보수파들에게 끌려다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철저한 민주주의와 해방을 꿈꾸었던 1980년 광주 시민군들의 이상은 여전히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광주항쟁의 진면목은 평범한 시민들이 장악한 세상이었고, 숭고한 해방의 세상이었습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늘 겉으로 광주항쟁을 계승했다고 말하지만, 해방 광주를 계승할 의지도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대통령 김대중은 전두환을 용서하고 사면했습니다.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었을까요?
해방 광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점을 짧은 순간이나마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전두환이 임명한 도지사나 시장이 없어도 광주의 시민들은 질서를 잃지 않았고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군대와 함께 기존 질서와 권력을 지키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당시의 광주는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주변의 어려움을 능동적으로 살피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고, 시민군들은 그 공동체를 지키려 했습니다. 시민군의 이름은 대부분 기억되지 않지만, 그들이 지키려했던 가치는 오늘의 반란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V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