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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지난 8일, 지방선거 전 헌법을 개정하려는 국회의 시도가 국민의힘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개헌 내용에는 광주민중항쟁을 헌법에 명기하자는 것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우원석 국회의장은 “여야 간에… 사실상 내용에 반대가 전혀 없는 개헌안을 놓고도 개헌의 문을 열지 못했다”고 국민의힘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극우정당 국민의힘이 정말 광주민중항쟁을 이 나라의 공식 통치 규범인 헌법에 포함하는 것에 이견이 없었을까요? 국민의힘 대표 장동혁은 부장판사 시절 전두환의 피고인 불출석을 허가하는 등 ‘봐주기’ 재판을 한 장본인입니다. 김진태 같은 자는 아예 “5.18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파가 물러서면 안 된다”고 노골적으로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당은 전두환-노태우가 만든 세력의 계승자들인 데다, 독재와 계엄을 2020년대에 되살리려 했으며, 그 시도를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과거와 현재를 모두 부정하는 광주민중항쟁을 헌법에 더하는 일에 찬성할 리 없습니다.
극우 정당이 이렇게 여전히 활보하는 현실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베프레터”는 오늘부터 5월 18일까지 두 차례 월요일 연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을 돌아봅니다. 오늘 싣는 “광주민중항쟁 돌아보기, 아래로부터의 관점으로(1)”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건과 맥락을 다룹니다. 다음 주 “광주민중항쟁 돌아보기, 아래로부터의 관점으로(2)”에서는 광주의 5월이 어떤 사건들로 채워졌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 정리해봅니다.
만약 우리 기억에 광주민중항쟁(이하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계엄 선포 날은 어떻게 돌아갔을까요? 이후 윤석열을 탄핵하면서 민주당 당시 원내대표 박찬대 의원은 한강 작가의 말을 빌어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한강 작가는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민중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에서 그 표현을 가져온 것입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광주항쟁에서 끝까지 싸우고 저항한 이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른 이들이 끝내 1987년 군사 독재를 무너트리지 못했다면, 2024년 그날 다시 독재를 거부하겠다고 국회 앞으로 즉시 용감히 모여든 이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광주는 1980년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승리했음이 분명합니다.
부마항쟁이 무너트린 박정희 정부

부마민중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러나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 끔찍하고 슬픈 일이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시민, 노동자들이 국가권력의 총과 칼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런 끔찍한 국가권력을 즉시 무너트릴 가능성은 없었을지 살펴보려면, 먼저 1979년 ‘부마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부산과 마산에서의 항쟁이 없었다면 광주항쟁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됐습니다. 오전 11시경 5천 명의 학생들이 대학 담벼락을 무너트리고 시내로 진출해 민주주의를 외쳤고, 오후에는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까지 합류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시민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5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특전사 2천 명을 투입했으나, 시위는 마산까지 번져나갔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공화당사와 경찰서, 방송국이 불탔습니다. 며칠 후부터는 노동자들도 합세했습니다. 부산은 1960년대에 대표적인 수출 경공업지대였고(YH무역 여성노동자들 투쟁도 부산에서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단지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1978년 금속과 기계공업 노동자 숫자는 84,342명에 달합니다). 마산은 1970년 한국 최초의 수출자유지역으로 선정되어, 화학섬유와 기계중공업 산업 단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와 시민들은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불만을 모두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막 시작된 경제위기의 전조 속에서 폭등하는 물가와 부동산 가격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또,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으로 독재를 계속하고, 그 지역 야당 정치인인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을 뿐 아니라, 부가가치세라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한 것에도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정부는 계엄군을 확대 투입해 폭력 진압을 계속했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했고, 1,563명이 연행됐습니다. 그러나 영화 <남산의 부장들>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 내부를 결정적으로 분열시켰습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이후 전국으로 더 시위가 확산될 수 있다고도 우려하면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를 모방하여 200만 명도 죽일 수 있다며 더 강력한 무력 진압을 건의했습니다. 결국 무력 진압에 반대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과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는 사건(10.26 사태)이 벌어졌습니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김재규가 쏜 총알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결정적 힘은 부마항쟁이라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습니다. 운동이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을 만들어 그들끼리 싸우다 권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쇼박스
대안 권력의 공백과 전두환의 등장
박정희의 몰락이 대중운동의 결과임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운동이 권력을 직접 무너트리거나 스스로 권력을 잡은 결과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즉, 부마항쟁 또는 당시 민주화 운동이 어떤 정치적, 법적 요구(예컨대 유신헌법 폐기)를 제시하고 지배계급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강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당시 민주화 운동은 자신들을 대변하는 유력한 정치 조직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신민당이 박정희 정권 기간 동안 제도권 정치에서 야당 역할을 수행하고 소위 ‘재야’(시민사회)에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계가 단단하고 뿌리 깊다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노동계급이 파업을 통해 현장을 통제하는 자치조직(평의회 등)을 발전시켜 권력의 기초를 놓은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평의회는커녕, 당시 한국에는 전국적으로 연결된 민주적 노동조합들조차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군부독재를 종식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은 매우 강했지만, 이를 어떻게 성취하고 어떤 새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대중 사이의 유력한 견해 또는 그 견해를 표현하는 조직이 현실에 부재했습니다.
대중 운동이 지배계급의 권력 구조 자체를 흔들며 대안을 제시하거나 그 안에 뛰어들 수 없다면, 결국 그 권력의 공백은 다른 기존의 힘 있는 세력이 메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1979년 말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이 바로 전두환 일당이었습니다. 박정희 암살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어 김재규의 체포와 수사를 명령했습니다. 이를 맡아 수행한 인물이, 바로 박정희가 생전에 임명한 군 보안사령관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힘을 키우다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군 내에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군의 정치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반란으로 이들을 모두 연행해 숙청하고 자신의 사조직(‘하나회’)을 중심으로 군 수뇌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12월 12일 이후에도 전두환이 권력을 완전히 손에 넣기까지는 걸림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민주화를 원하는 대중의 염원이 살아있었고, 그 덕에 운동의 힘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등을 주축으로 한 야당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선제로 개헌해 대통령을 다시 선거로 뽑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서, 이들의 호소는 학생운동을 비롯한 재야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1980년 3월 개강이 되자, 대학생들은 12월 12일 군사반란에 맞서 거대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5월 2일에는 서울대학교에서 1만 명이 모여 ‘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을 투쟁 요구로 채택했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대학생 10만 명이 모여 ‘계엄철폐’를 외치며 정부에 민주화 일정의 제시를 요구했습니다. 노동자들도 자기 권리를 지키고 삶을 바꾸려는 투쟁에 나섰습니다. 4월 9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농성을 시작으로 4월 한 달 동안 719건의 쟁의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4월 21일에는 강원도 정선군에서 광부 3,500명이 사북읍을 점거하며 싸웠습니다. 전두환과 운동 사이 전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역 회군; 우리가 피한다 해서 저들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직선제 요구는 전두환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군부독재가 워낙 대중적 인기가 없었던 탓에, 직선제가 되면 전두환 일당이 선거에 나가도 승리할 수 없을 게 뻔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유산, 즉, 1972년 유신헌법 개정 이후 바뀐 간선제 대통령 선거에 기대야 했습니다. 전두환은 대규모 시위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개시하여 언제든 공수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할 태세를 갖추고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했습니다. 또, 전두환 일당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대학생들이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고 몰고갔습니다. 북한이 곧 남침할 상황이라는 소문도 퍼트렸습니다. 그는 유혈사태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12.12 쿠데타를 통해 장악한 권력을 영구집권으로 유지하고자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압력에 가장 먼저 굴복한 것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소위 “3김”) 등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남침 위협설’을 근거로 북한과 군부 모두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습니다. 어차피 5월 20일 국회가 열릴 것이 예정되어 있고, 3김 정치인들과 국회의원들 다수가 계엄 해제를 할 의지가 분명하니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가장 시위대에 영향이 있었던 김대중은 군인과 노동자, 상인 등 전 국민의 시위 합류를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대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학생 지도부는 앞서 본 5월 15일 서울역 시위에 10만 명이나 모이자, 오히려 시위가 더 커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시위대를 해산시킬지, 함께 거리 행진을 하거나 농성을 할지 등 전술 문제를 두고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이 격론을 벌였습니다. 저녁에 신현확 국무총리가 ‘연말까지 개헌을 하겠다, 시위를 자제해달라’는 성명을 내자, 결국 학생회장들은 “일단 멈추고 수업으로 돌아가자”고 결의했습니다. 군부가 시위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까지 투입하면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시위가 반격의 빌미를 주는 것일 수 있다며 해산을 결정한 것입니다.

서울역 회군 ⓒ한겨레
이렇게 운동이 망설이는 것을 본 전두환 일당은 더 기세등등해져서 움직였습니다. 5월 16일, 군부는 서울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단이 모인 회의를 습격해 21개 대학 학생회장을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5월 20일 국회가 열리기 전에 서둘러 결정적인 거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최규하를 겁박해 기존의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전국의 모든 시위와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전국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5월 18일 새벽 2시, 전국 92개 대학과 국회 등 거점에 계엄군 2만 5천 명이 배치됐습니다. 신군부는 부정축재 혐의를 뒤집어씌워 김종필을 연행하고,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내란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김대중을 연행했습니다. 김영삼은 가택 연금한 뒤 강제로 정치 은퇴를 선언하게 했습니다. 20일에 임시국회에 등원하기 위해 국회의원들 38명이 나타났지만, 모두 군 병력에 의해 저지됐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전두환의 계획 최종 단계가 실행된 것입니다.[VF]
광주민중항쟁 돌아보기, 아래로부터의 관점으로(2)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