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이재명 대통령,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 연합뉴스
* 이 글은 5월 1호 베프레터(5/5)에 실렸습니다.
정부 기념식에 간 양경수 위원장
지난 5월 1일, 정부는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명칭을 바꾸고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을 포함해, 민주노총에 가맹한 노동조합 여러 곳의 위원장들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노동 존중 사회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결코 양립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라고 말했고, 양경수 위원장은 “모두의 노동절을 맞이하게 된 것”이 기쁘다고 화답했습니다. 언론에는 양경수 위원장이 한국노총 위원장,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속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놀랍습니다. 민주노총은 세상에 난 뒤부터 지금까지 국민의례를 하지 않아 왔습니다. 2009년 민주노총 공무원노조는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징계까지 받았지만, 4년을 싸워 결국 징계를 취소시켰습니다. 2007년 전태일 열사 노동자 대회에서, 민주노총 당시 이석행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기업 하기 좋은 나라냐 노동하기 좋은 나라냐를 선택하자”고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노총 강령에도 “권력과 자본의 탄압과 통제를 분쇄”한다는 말이 여전히 남아 있음은 물론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들입니다. 민주노총은 자본은 물론, 국가 권력과 기성 정치권이 노동자 편에 서지 않는다는 노동계급의 깨달음을 바탕에 두고 생긴 조직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총의 양경수 위원장과 일부 대표자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내세우는 “모두의 노동절”에 호응합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전략은 변하지 않는 것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변화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 변하지 않은 것인지는 묻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양경수 위원장이 미국 자본가에게 한 수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한국 자본주의의 무엇이 얼마나 변했기에, 이재명 정부는 이전의 민주당 정부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는 우리 민주노조의 전략을 바꾸려 하는 것일까요.
1886년 미국 VS 2026년 한국
양경수 위원장 본인이 노동절 연설에서도 힘주어 말했듯이, 화물연대 서광석 열사가 돌아가신 지 불과 열흘이 지났을 뿐입니다. 열사는 누가 죽였습니까. 노동자들과 교섭하지 않기 위해,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CU 자본이 대체인력을 투입했습니다. 경찰은 그 대체인력의 업무를 지휘-지원하기 위해 무리하게 물리력을 동원했습니다. 결국 장관이 다급하게 말을 바꿨지만, 애초에 고용노동부가 이 사건 직후 낸 입장은 “화물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놓고 그들 중 누구도 지금까지 단 한 마디 공개 사과나 유감 표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절의 기원이 된 미국의 1886년 헤이마켓 사건은, 미국 경찰과 사법부, 자본이 함께 한 마음으로 공모해 노동운동가들을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사건입니다. 2026년 한국과 1886년 미국 사이에 대체 무엇이 얼마나 변화했기에, 정부가 기념하는 노동절이라는 해괴한 행사에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것일까요?
양경수 위원장은 페이스북에 자신이 정부 행사에 참여해 “우리의 이야기를 전”했다고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매년 노동절 집회에서 한국 사회를 향해 항상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왔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양경수 위원장의 “430여 개의 원청에 교섭을 요청했지만 교섭에 응하는 곳은 40여 곳에 불과한 실정 … 정부가 먼저 모범적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번짓수조차 맞지 않습니다. 괴이한 방식으로 노조법을 개정하고,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 같은 복잡하고 위헌적인 제도로 하청 교섭 구조를 ‘세팅’한 것이 이재명 정부 자신입니다. 이재명 정부가 원청 기업이 순순히 하청 노동자 교섭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몰랐을까요? 심지어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은 의무적으로 교섭할 사항이 아니라며 원청 기업 편을 든 것도 이재명 정부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려 들지 말고, 민주노총이 스스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진지하게 만들어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양경수 위원장이 민주노총이 대중 투쟁과 파업을 벌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화와 외교를 통해 정부가 노동조합의 요구를 진지하게 수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런 착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월 “노동운동 탄압하지 않겠다, 열심히 하라”고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은 지 불과 세 달만에 서광석 열사가 돌아가셨습니다. 또, 이재명 대통령은 노동절 직전에 “일부 노직 노동자의 과도하고 부당한 ‘나만 살자’식 요구”를 거론하며 날을 세웠습니다. 누가 들어도 투쟁하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겨냥한 이야기였습니다. 대체 누가, 무슨 객관적 기준으로 “열심히” 해도 되는 투쟁과 “과도한” 투쟁을 구분한단 말입니까. 그런 자의적 기준대로라면, 1987년 가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온 민주노총의 투쟁과 요구는 과연 앞으로 어느 쪽으로 분류될까요?

민주노총은 삼성전자 투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어야
이런 ‘이재명 스탠다드’의 눈치라도 보는 듯, 앙경수 위원장은 올해 노동절 연설에서도 시종일관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고 고무하고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는 맥락이 아니라, 그저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당당히 말하기 어려워 ‘사회적 약자’ 뒤에 숨으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런 말들은 차라리 입 안에서 삼키는 것이 낫습니다. 민주노총은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해야 합니다. 노동자 사이의 상대적 차이를 내세워 계급을 분열시키려 하는 ‘노동시장 양극화’ 같은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고, 자본과 노동계급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당장 얼마를 벌고 있든, 고용 형태가 어떠하든 그들은 기업에게 부품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말 한 마디에 해고되고, 임금이 깎이고,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노동계급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구라도 싸워 승리하면 그 투쟁은 다른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고무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 팽배한 이윤 논리와 기업의 힘이, 누구에 의해서든 일단 약화되면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진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번 노동절에서 양경수 위원장이 했어야 했던 일은 정부 기념식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삼성전자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민주노총 집회에 초대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민주노총이 앞장 서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옹호하고, 연대의 뜻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쌩뚱맞게 삼성전자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임금을 주주에게도 나눠주어야 한다는 둥(주주의 배당은 노동자들의 임금 몫이 나간 이후에 정해지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청 기업에게도 배분되게 해야 한다는 둥(하청 기업과 삼성전자 사이의 문제가 지금 노동자 파업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 모든 선의를 가장한 공격들을 민주노총의 모든 노동자들이 동의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실제로 파업을 벌여 승리한다면, 삼성전자든 현대차든 AI와 로봇 등 신기술 도입에서 노동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자본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정부와 백날 AI 도입 방식이나 절차를 놓고 부질없는 탁상공론을 벌이는 것보다, 투쟁의 승리와 확대가 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권리를 지킬 수 있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노동절의 진정한 교훈; 국가는 누구 편인가
말로만 다이어트를 이야기하면서 운동도 하지 않고 술과 야식으로 밤을 지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도 그의 결심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이 내세우는 ‘투쟁’ 구호도 꼭 같습니다. 상층의 지도부와 임원, 대표자들이 말로 아무리 파업이네 투쟁이네 말해도, 그들 자신부터 평소 정부에 의존하고 끌려다닌다면 누구도 그런 종이호랑이를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정부와 자본은 물론, 조합원들조차도 자신이 속한 조직이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합원들은 지도부의 꼭두각시 병정이 아닙니다. 조합원들은 파업 지침을 내리거나 파업의 중요성을 교육한다고 파업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파업의 필요성을 느껴야만 행동합니다. 따라서 조합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과 정부 누구도 그저 믿고 기다릴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지금 민주노총 상층 지도부가 보이는 태도가 갖는 가장 큰 해악도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양경수 위원장이 지금 하는 행동은 조합원들에게 민주당 정부를 믿어보자는 메시지로 읽힙니다. 조합원들이 민주당 정부에 대해 가진 기대를 털어내 투쟁에 나서게 해야 할 마당에,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자본-정부와의 대화에 골몰하다 파업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뒷통수를 맞게 되면, 많은 조합원들이 혼란과 사기 저하에 빠져 행동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민주노조의 좌파 활동가들은 지금 상층 지도부가 나아가는 방향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조합원들의 자주적 투쟁을 조직하고 확대하며, 무엇보다 민주당 정부가 아닌 스스로를 믿고 행동하자고 제안해야 합니다. 기층에서 투쟁이 벌어지면,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확대하려 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조합원 대중의 불만과 만날 수 있을 때, 민주노총 상당수 지도부의 온건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투쟁 물결이 열릴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방향의 밑바탕에는, 국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놓여 있습니다. 1886년 헤이마켓 투쟁에서 산화해 간 노동운동가들, 혹독한 탄압에도 투쟁을 놓지 않았던 미국의 노동계급이 우리에게 물려 준 바로 그 기억 말입니다. [V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