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배계급의 생존 전략 확인한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연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하 “김정은”)이 지난 23일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에 대응되는 기구) 연설에서 “한국을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공인하고 가장 명백한 언사와 행동으로 철저히 배척하고 무시하면서 다루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핵 없는 한반도를 목표로 하면서 남북교류와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한반도 평화공존 정책”)과는 대조됩니다.

김정은이 문재인에게서 얻은 교훈

김정은이 한국의 손짓을 아예 무시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역대 민주당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북한 나름의 평가가 끝나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9월 평양에서 정상회담까지 했으나, 이런 과정을 거쳐 발표된 ‘평양공동선언’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북한이 미국의 제재로 인한 경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강하게 원했던 개성공단 운영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은 시작도 못 해보고 모조리 불발됐습니다. 당시 미국 트럼프 정부가 대북 제재에 위반된다고 딴지를 걸자, 한국 정부가 바로 꼬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한편, 김정은은 한국의 지배계급이 미국 지배계급의 의사를 정면으로 거스를 의지가 거의 없다는 사실 외에도 또 한가지를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정권이 한국 정부에 유화적 태도를 보일 경우 북한 대중 사이에서 한국 문화가 은밀히 확산되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태와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이 북한 대중에게 확산되는 것은, 곧 대중의 경제적 불만이 정치적 불만으로 표현될 위험성을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김정은은 북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2021년 통과된 ‘반동문화배격법’으로, 현재 한국 드라마 등을 유포한 자는 최고 공개 총살형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김정은식 ‘먹사니즘’과 러시아 파병

그러나 이런 ‘채찍’으로만 권력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김정은이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북한 경제의 재건입니다. 김정은은 평양을 중심으로 주택 대단지를 새로이 건설하고, 지방의 산업 단지를 증설하고, 전국적으로 밀 농사를 적극 늘려 식량난을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외적 생존을 위해 ‘핵 개발’에 모든 사회적 자원을 ‘올인’하던 노선에서, 권력의 대내적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대중을 지금보다 잘 먹여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노력의 결과,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2023년부터 3%대로, 회복 국면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경제 개발을 위한 기본적 자원과 동력을 미국의 경제 제재를 무시하는 국가들, 특히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2024년 북한 외국 무역의 98% 비중은 중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미중 갈등이 강화되는 것도 생존에 도움이 됩니다. 중국의 편을 들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의 관계 역시 북한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김정은은 북한의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24년부터 러시아의 전쟁에 10대 청소년 다수를 포함한 병력 2만 명을 “동맹군”으로 파병했습니다. 2025년 10월 기준으로, 이들 중 이미 2천 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평범한 북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대가로 북한이 얻은 “경제 효과”는 28조 7천억 원 규모, 연간 부족한 식량 33년치를 살 수 있는 금액과 맞먹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북한 지배계급의 생존 전략과 한반도 평화

김정은의 이번 최고인민회의 연설은, 북한의 이러한 최근 생존 전략을 모두 압축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여전히 미국을 비난하고 자위적 핵을 옹호하면서도, 트럼프와의 대화는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미국의 종속변수에 불과한 한국은 김정은에게 유의미한 대화나 우호의 상대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아래로부터 무너트릴 수 있는 위험요소일 뿐입니다. 

오늘날 미국 지배계급은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을 위해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기를 원하고 그 명분으로 북한의 ‘핵 위협’을 계속 활용하려 합니다. 만일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미군이 남한에 대거 주둔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따라서 미국 지배계급에게는 ‘불량국가’로서의 북한이 반드시 필요하고, 적대적 대북 정책을 바꿀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미국 지배계급의 이런 위협이 지속되는 한, 북한 역시 그에 맞설 무기로 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미국의 대북 제재를 뚫고 ‘자력갱생’을 해내려면, 북한 정권은 생활의 개선을 약속하면서도 북한의 대중을 계속 쥐어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착취에는, 이번 러시아 파병의 경우처럼 자본주의 세계의 지정학적 경쟁에 끼어들어 북한 대중의 목숨을 ‘판매’하는 일 또한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립과 긴장의 구도 속에서, 한국의 지배계급 또는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한반도에서 평화가 정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 지배계급의 패권과 제국주의가 약화되는 것,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위험천만한 일을 동아시아와 세계에서 벌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트럼프의 이란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한국 정부가 김정은처럼 “국익”을 위해 평범한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일, 미국 제국주의에 힘 보태는 일도 막아내야 합니다. 북한 정권을 악마화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바로 반전평화운동을 건설해나가는 것입니다. [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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