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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 50살을 앞두고 내 인생이 곧 끝날 것 같았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고,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광고, 뉴스, TV 그 어디에서도 50대 여성에 대한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뇌에 ‘50대 여성이 되면 당신의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심는다. 이런 시스템에 크게 항의하며 그 개념 자체를 부수고, 정신 차리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 감독 코랄리 파르자(Coralie Fargeat) 인터뷰 中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Elizabeth Sparkle)은 그가 거주하는 크고 세련된 집에서 짐작이 가듯이 업계에서 아주 성공한 배우이다. 엘리자베스의 명성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이름처럼 빛나는 그의 ‘스타’ 명패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빛바랜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그를 소위 ‘퇴물’로 여기며 더 어리고, 더 잘 팔릴 수 있는 여성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본인 역시 과거 나이 든 여성을 대체하며 스타덤에 올랐을 것이기에 엘리자베스는 이 비정한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고, 자기 삶이 곧 쓸모없어질 것이라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는 결국 젊은 버전의 본인, 수(Sue)를 만들어 스스로를 대체한다.
“아름다움”을 선택하기?
영화 초반부의 그는 본인이 합리적인 소비자처럼 스스로를 젊게 만드는 신비의 약품(“서브스턴스”)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잘 만들어진 광고를 보고 상품의 실용성을 판단한 뒤, 전화를 걸어 물건을 주문하고, 상품 약관을 꼼꼼히 읽어보며 혹시 모를 위험요소를 대비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영화를 본 우리가 모두 알듯이 그는 서브스턴스의 사용을 통제하기는커녕, 단단히 구속되어 본인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심지어 서브스턴스의 관계자(?)가 부작용이 걱정된다면 사용을 그만두고 사물함에 돌려놓으라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젊고 매력적인 수로서 살아가는 일주일(또는 그 이상)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신체가 뒤틀리고 부서져 인간의 형상으로도 볼 수 없는 흉측한 괴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왜, 본인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그의 ‘주체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구조가 여성을 어떻게 옭아매는지 그 폭력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노력한다. 사실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사용하게 된 것, ‘일주일 규칙’을 지키지 않아 신체가 변형된 것, 그럼에도 서브스턴스 사용을 계속하는 것, 그로 인해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 모두 온전히 그의 자발적 선택으로 볼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혐오적 구조가 그렇게 선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정육점에 내걸린 고깃덩어리의 등급을 나누듯이, 이 사회는 여성을 남성 중심의 획일화된 외형적 잣대(얼굴, 몸매, 나이 등)로 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 잣대에서 높게 평가받는 것을 여성의 유일한 행복으로 여기는 만큼, 낮은 평가를 받게 된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사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도 당연하다.
탐욕스러운 중년 남성 제작자 하비(Harvey)는 이러한 여성혐오적 구조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실제로 유명 영화 제작자였으나, 할리우드 미투운동을 촉발한 성착취자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과 겹쳐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게걸스럽게 새우를 뜯어 먹는 입놀림, 끊임없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눈빛과 대사를 통해 하비는 마치 여성을 착취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혐오스럽게 그려진다. 영화는 하비를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구조와 동일시한다. 감독은 납작함을 감수하면서도,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입에 떠먹여 주고자 한 것이다.
한편, 자본주의의 여성혐오적 시스템이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서브스턴스를 ‘구매’하는 엘리자베스처럼 구속의 대상인 여성들에게 ‘이것은 당신의 주체적 선택이다’라는 착각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체제는 물리력을 행사하여 강제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본인을 구속할 수 있도록 자기혐오, 자기착취의 기제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광고판’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를 선망의 대상으로 전시하는데, 이는 한때 그 광고판의 주인공이었던 엘리자베스가 불안을 느끼도록 자극하는 상징이다. ‘화장 수정 장면’ 역시 이를 잘 보여주는데, 엘리자베스는 거울을 보더라도 본인의 눈으로 자기 모습을 바라보지 않는다. 사회가 강요하는 폭력적인 렌즈로 본인을 평가하며 혐오하고, 삶 자체를 그에 종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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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과 거부, 저항과 연대
이 장면이 공감과 씁쓸함을 자아내는 것은 그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미의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 매력적 외형인지, 남성에게 섹스어필이 되는지, 연애ㆍ결혼 시장에서 잘 팔리기 위해 어떻게 본인을 가공하고 전시할 것인지. 이 사회는 위와 같은 질문을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소환하며 삶의 가치와 행복도를 평가하는 잣대로 활용하도록, 그 평가에서 뒤처질까 봐 불안감을 느끼며 체제에 순응하도록 강제한다. 영화는 자발성의 외피를 두른 체제의 구속으로 내면이 황폐해지고, 몸이 망가지며, 나답게 살아갈 삶의 다양한 가능성이 삭제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에서까지 엘리자베스는 무대 위에 올라가 본인을 소비했던 관객들에게 애처롭게 애정을 갈구한다. 물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나 피를 난사한 것은 일종의 복수이며, 조롱이다. 그러나 숨이 멎는 순간까지 본인의 이름이 적힌 ‘스타’ 명패를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속 시원함이나 해방적인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영화 내내 강조되는 사각형과 긴 복도의 이미지에 갇힌 엘리자베스는 감옥으로부터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여성들이 이러한 폭력에서 벗어나 해방되려면, 그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 수는 엘리자베스의 등골을 뽑아먹으며 젊음을 유지한다. 수로서 느끼는 ‘살아있음’은 이 체제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는 엘리자베스의 자기혐오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울 이미지다. 둘은 한 몸이지만, 본인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구조에서 찾지 못하고 서로를 착취하고 경쟁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타인을 밟고 올라서 당장의 경쟁에서는 이긴다고 해도 내가 밟은 경쟁자는 언젠가 경쟁에서 도태될 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체제의 순응 압력이 강하더라도, 우리가 해방되려면 우리를 감옥에 가두는 체제가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다만, 문제의식을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실천을 하더라도, 파편화된 채 개인적 저항으로만 머무른다면 체제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맞서기는 쉽지 않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을 뒤집어 엎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힘이 세져야 하고, 결국 이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일치되어 같은 방향으로 행동하고 세를 확장할 수 있는 ‘집단’의 존재이다. 영화가 내내 강조하는 것처럼 구조는 개인을 속박하지만, 영화가 하지 못한 이야기는 구조 역시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변화를 열망하는 개인들이 연대하고 투쟁하며 힘을 모아내려면 이 폭력적인 체제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낙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각자도생과 파편화가 시대정신인 이 자본주의 시대에 변화를 상상하는 낙관은 때로 무모해 보이지만, 그것마저 없다면 변화를 위한 행동은 더더욱 불가해진다. 억압받는 우리들의 연대만이 체제의 압력에 대항하는 힘을 만들어줄 것이다.[VF]
